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6 17:27:21, Hit : 3712
 들빛회 소식지 제20호

정의가 강물처럼
  2002년 5월 발행 제20호

  원조피로
  박준영 / 아시아가톨릭연합통신 한국지국장, 본회 실행위원

사랑에는 끝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손길, 도움의 손길에는 한도가 있다. 영양실조로 배가 불쑥 튀어나온 어린애, 아니면 말 그대로 뼈만 남아 앙상한 갓난아기.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 같은 곳의 헐벗은 난민들에게 돈을 보내도록 재촉하는 장면들이다. 원조피로(funding fatigue)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참상이라 할 지라도 세상의 이목을 한정없이 붙잡아 두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저주받은 자본주의의 패션 유행과도 같다. 어제는 아프리카의 내전, 방글라데시의 홍수, 남미의 지진, 오늘은 북한의 기아, 그리고 이제는 아프카니스탄으로!
   9.11테러 뒤 아프카니스탄 전쟁이 벌어지고 그 곳 난민들이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북한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 올 여름 다시금 대규모 굶주림이 예상된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아무리 큰 재난에도 보통 3년 이상 대규모 헌금이 이어지지않는다는 원조피로 현상이 북한에는 예외처럼 보였으니 이제는 약발이 다한 것일까? 그나마 "세계1위"를 무려 7년이나 유지한 것만도 거의 기적이었다. 홍수나 재난으로 대규모 아사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현대국가제도 아래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3세계의 빈곤문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탄 아마티아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8년째 이어지는 북한의 대규모 식량부족은 지배계급이 수탈한 결과이며, 좋게 보아도 지도부가 직무를 게을리 한 탓이다.
  그러고 보면 원조피로라는 것은 현대 세계에서 대규모 재난은 "일시적"일 뿐 나름으로 합당한 근거를 둔 합리적 행동이다. 탓할 일 만은 아니다.

  
  특집-지구촌 정의평화의 길1
  긴급호소-라말라에서 온 애타는 호소문

  “이 글은 최근 벌어졌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라말라 시에서 한 미국인 대학생이 보내온 호소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인 라말라 - 제 이름은 차포라 라이터,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에서 온 학생입니다. 저는 현재 라말라에 잇습니다. 저희들은 끔찍한 포위상태에 있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과 무장한 이스라엘 정착민 민병대에 의해 학살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 가능한 모든 외부의 긴급한 도움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저는 예전에 살면서 공부했던 팔레스타인 도시에 잠시 들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목요일 오후에 이스라엘군은 라말라로 가는 입구를 봉쇄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아이들을 안은 여성들은 어린 아기와 아기들을 데리고 라말라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들은 비속을 뚫고 달리다가 미끄러지거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가운데 안전지대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지프차들이 사방에서 속도를 내어 그 쪽으로 달려오더니 여성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저에게도 총을 쏘았고, 저희들은 반대방향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들은 뒤쫓아 와서는 들판에서 짐승을 사냥하듯이 사람들을 사냥했습니다. 밤이 되자, 이스라엘 탱크들이 침공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계곡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도보로 접근해 우리 집을 둘러싸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히브리어로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우리 집 문을 마주보고 사방을 향해 총탄세례를 퍼부었고, 탱크의 포격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거의 나흘 동안 바닥에 엎드려 있었지요. 노이들이나 아기들, 혹은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조차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저의 상황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았습니다. 날씨가 매우 추워서 거의 모든 가족들이 한 방에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인슐린 같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의약품들이 없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약이 있는 경우에도 소량으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모두들 음식, 물, 난방의 부족으로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낮에 저희들은 군인들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는 소리를 들었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구급차 통행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줄지어 무릎 꿇린 채 사살한 핏자국들도 있었고,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는 그들의 신분증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 눈을 가리고 옷을 벗긴 후 데리고 가거나 줄을 세운 후 벽에 기댄 그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군인들과 민병대원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쏘고 있다고 외쳤으며, 그러고 나서 전화선도 끊겼습니다. 인권단체들의 사무실과 미디어 센터들도 습격을 당했고 모든 것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실제 살해된 사람들의 숫자는 언론에서 확인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도처에 있는 이스라엘 저격수들은 움직이는 사람 누구에게나 사격을 가합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든 기자들이 라말라를 떠날 것을 요구하고, 오늘 또 다른 외국인 기자가 총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외국인들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추방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목격자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병원들 또한 둘러싸여 공격을 받고 있으며, 이스라엘 군인들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데려가 심문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 여성 환자가 병원에서 나가려고 시도했으나 이스라엘군은 그녀의 목을 쏴서 죽였습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는 수많은 매장되지 않은 시체들 때문에 질병이 확산될까봐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량 학살에 관한 보고들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친척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고 있으며, 우리는 아이들을 포함해서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의 숫자가 600명을 넘어 700명에서 800명 사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억류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인권단체들과 법률지원 단체들의 요구는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서실은 이제까지 끌려간 사람들의 10%가 18세 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갔을 때 차들은 총탄에 맞아 부서져 있었고 탄피가 도로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 차들 속에 사람들이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저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보고는 전혀 없지만, 그들이(살아있든, 죽었든) 어딘가에 존재함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오후, 이스라엘 군은 갑자기 통행금지 시간을 늦춰서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구하러 2시간 동안 외출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인들이 대부분의 상점에서 음식을 약탈해가서 빵이나 먹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구해보려고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군이 두 시간 동안 통행금지 시간을 늦춘다고 말했지만-우리는 여전히 의약품들을 옮겨올 수 없었고, 급히 필요한 모든 물품을 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에 무차별적으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사격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굶긴 후 허락을 받아 음식을 구하러 갈 때 사람들을 쏴 죽인다는 잔인한 테러 전술이었습니다. 제가 살았단 베이투니아 지역에 있는 한 아파트 건물에서 몇몇 가족들이 포함된 저의 이웃들 60명을 한 방에 밀어넣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 아파트, 건물이 자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건물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방패’로 쓸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역에 있는 14살에서 45살까지의 남성들을 체포하고 있다는 보고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에 잡혀있는 팔레스타인 가족들처럼 민간인들이 이스라엘 탱크가 예비보안지역을 공격할 때 탱크 앞에서 방패막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떠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그 장소를 떠나려 하면 사격을 가한다고 합니다. 그 곳의 건물들은 불타고 있으며 사람들은 내부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더욱 더 많은 폭발음과 총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폭발음, 또 다른 총성, 도무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대량학살입니다. 외국 대표단들이 들어오려 했으나 발길을 되돌려야 했습니다. 국제적십자 위원회가 도우려고 하고 있지만 그들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도와 주세요. 저는 물론 저와 이곳 사람들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학살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인류가 비록 달나라에 사람들 보낼 수 있을지언정 인종청소는 멈추게 할 수 없는 이 세상이 정말로 두렵습니다.
  미국의 뉴스에서는 어떠한 시위장면도 거의 볼 수 없더군요. 당신들은 도대체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학살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제발 거리에 나가, 제발 당신들의 대표들에게 요구해 주십시오. 각국의 수도로 행지해서 이스라엘인들이 철군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외쳐 주십시오. 지금 행동하십시오! 이스라엘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고, 군사 점령하의 팔레타인에서 범죄만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 주십시오.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위한 국제적인 보호를 요구하십시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안에서의 인권침해를 중단하라고 외쳐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투쟁의 전부입니다. 신의 은총으로, 제발 이 대학살을 중단시켜 주십시오. 제발 도와주세요.  기사제공 -국제민주연대-


  특집-지구촌 정의평화의 길2
  5월20일 동티모르 독립선포

  동티모르 독립과 자유를 위한 국제적 호소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나나 구스마오, 지난 2000년에는 제1회 광주인권권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을 방문해 ‘나의 삶과 저항, 그리고 동티모르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갖기도 했고, 한국의 많은 민주단체들이 동티모르 민중들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함께 연대하며, 지원금을 모아 전달하고,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등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곳입니다. 독립국가 동티모르의 대통령 사나나구스마오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또 새로운 여정에 깊은 지원과 축하를 보냅니다.

  오는 5월20일, 수 십년 동안에 걸친 끈질긴 독립투쟁 끝에 동티모르가 드디어 21세기에 걸친 끈질긴 독립투쟁 끝에 드디어 21세기에 새로이 독립을 선포하는 첫 번째 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지난 4월14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86%의 투표율에 83%라는 압도적인 지지속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 독립영웅 자나나 구스마오의 독립선언으로 독립국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될 동치모르에는 벌써부터 전 세계에서 축하와 연대의 메시지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간략히 정리한 동티모르가 독립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험난한 발걸음이다.
  1975년 12월7일 : 1년 전 점령국이었던 포르투갈이 동티모르를 포기함으로써 생긴 힘의 공백상태를 틈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
  1976년 :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영토의 병합을 선언하였고, 이는 유엔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였다.
  1975년~1999년 중반 : 인도네시아 군의 탄압으로 침공 전 인구의 약 4분의1에 해당하는 2십만명 이상의 동티모르인들이 대량학살과 기아, 질병 등으로 죽어갔다. 특히. 인도네시아 군의 조직적인 강간, 살인, 고문, 임의 체포 등은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또한, 석유, 커피, 대리석 등의 천연자원들이 인도네시아의 독재자인 수하르토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약탈되었고,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열강들은 천연자원의 이권을 분할받는 조건으로 인도네시아의 불법침공을 묵인하거나, 지원하였다.
  1991년11월12일 : 인도네시아 군, 수도 딜리의 산타크루즈 묘지에서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최소한 100여명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이 서방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1996년10월 :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 호세라모스 오르타, 벨로 주교가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1999년 8월30일 :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대 다수의 동티모르인들은 24년동안의 인도네시아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투표 직후 이어진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의 테러와 파괴로 전체 국토의 70%가 파괴되고, 수 천명이 살해되었으며, 3주만에 약 25만명이 고향을 탈출해 난민이 되었다.
  1999년 9월 20일 : 오스트레일리아를 선두로 한 7천5백명의 다국적군이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 수도 딜리에 도착했다. 한국군도 베트남전 이후 최초로 상록수 부대를 북부 로스팔로스 지역에 파병하였다.
  1999년10월25일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완전한 독립을 이룰 만큼의 준비가 될 때 까지 동티모르를 위임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안보리 결의안에서 15개 회원국들은 유엔의 깃발 아래 동티모르인들과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건설하기 위해 9,150명의 평화유지군과 감시단, 1,640명의 경찰관과 수백명의 민간행정요원들, 구호요원들을 파견하는데 동의했다. 공식적으로 동티모르 유엔과도정부(UNTAET)로 이름 붙여진 과도정부의 수반으로는 브라질 출신의 유엔 관리인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가 임명되었다.
  2001년 7월 : 동티모르 국제전범재판소를 설치하라는 요구를 가라앉히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새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딜리와 수아이, 리퀴샤에서 1999년 8월과 9월에 발생한 반인도적 범죄들을 다루는 특별법정을 열겠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검사들은 초기에 23명의 전범 혐의자들 명단을 작성했으나 18명의 고위급 인도네시아 관리들-3명의 장성들을 포함해 - 만이 기소되었다. 2002년 3월까지 7명의 군인과 경찰들이반인도적 범죄혐의로 기도되었으나 이들이 제대로 처벌될 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2001년 8월30일 : 제헌의회를 위한 선거에서 90일 이내에 헌법 초안을 마련하고 내각을 구성할 과도 의회가 88명의 대표자로 구성되었다. 동티모르의 첫 번째 민주선거에서는 24년 동안 동티모르 독립 투쟁을 이끈 프레틸린(Fretilin)당이 승리했는데, 프레틸린은 총 88석중 55석을 차지했고, 프레틸린 지도자인 마리 알카티리(Mark Alkatiri)가 수상이 되었다.
  2002년 3월 : 4천명의 난민들이 서티모르의 난민캠프로부터 동티모르로 되돌아갔는데 이는 지난 2년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4월까지 약 20만명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반면 6만명이 아직도 서티모르에 남아있다.
  2002년 4월14일 : 전체 유권자 378,548명 중 86%가 동티모르의 첫 대통령 선거에 참여해 약 83%가 독립영웅이었던 자나나 구스마오에게 표를 던졌다. 구스마오는 동티모르 사회내의 통합과 갈등, 치유, 동티모르인들과 인도네시아 사이의 화해에 주력해왔다.
  2002년 5월20일 : 독립국가 수립 공식 선포!!
  기사제공-국제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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