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1 17:55:53, Hit : 4092
 들빛회 소식지 제4호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회보 제4호

정의가 강물처럼


분단극복의 소명
광복 50주년에 부쳐

최기식 신부 / 원주교구(본회 회원)

  우리 민족이 올해로써 광복 5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광복50주년 기념행사들이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지나간 이 50년은 동시에 민족분단의 크나큰 아픔을 겪어 온 기간이다. 광복 이전, 일제의 식민 통치 기간 36년을 우리는 끔찍스럽게 긴 세월로 여겼었다. 그런데 분단의 비극은 그 보다도 훨씬 더 긴 50년에 이르렀다니 이 어처구니없는 불행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 것인가.
  이 분단의 책임은 결코 우리 민족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제2차 대전을 끝내고 세계를 다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양대 진영으로 나눈 미국과 소련의 탓이었다. 강대한 외세가 한반도의 약소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6, 25전쟁이라는 엄청난 재앙까지 겪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한국 민족사의 성격을 ‘수난사’라고 정의하고 그 수난에는 하느님으로 부터의 어떤 소명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랜 수난사의 마지막은 세계 양대 진영이 충돌한 한반도의 남북 분계선을 허물어 마침내 세계 평화 구현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사의 소명이며, 이 소명에 부응하는 것은 결코 외세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 민복의 주체적 역량이 분단을 극복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현실의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하고 해결하는 데에 진실과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의 한반도 상황에서 누가 과연 분단극복의 실천적 원리를 지니고 있을까. 정권 차원에서는 남쪽도 북쪽도 언제나 전략 전술에만 치우쳐 있다고 보게 된다. 이 차원에서는 북에서 주장하는 것을 남에서 반대하고, 남에서 주장하는 것을 북에서 반대한다.
  여기에서는 화해에 다가가는 ‘대화’마저도 마련하지 못한다. 가톨릭교회의 ‘사목헌장’은 제시하고 있다. “대화는 곧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그 누구와도 대화해야하며 교회를 박해하는 이와도 대화해야 한다.”
  전쟁 도발의 오류를 범한 이와도 대화해야 한다. 오류와 오류를 범한 이를 구별해야 한다. 오류를 범한 이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화를 통해 서로를 개방함으로써 화해와 일치에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대화로 시작해서 일치에 이르는 실천원리를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누누이 제시하고 있다. 개방과 화해, 이것은 어둠속에서 분열하고 반목하는 사람들에 빛을 비추고 서로 끌어안고 사랑하게 하는 일이다.
  “빛이 되어라” 지학순 주교님이 내걸은 사목지침을 생각하며, 이 정신으로 우리는 분단극복의 실현에 앞장서 나서야 할 것이다.


광복 50년, 총체적 빈곤의 현실

변진홍 / 우리신학연구소

  정부는 광복 50년 8, 15 광복절 행사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 지붕위의 첨탑을 다이아몬드 줄 톱으로 절단하여 전면적인 건물 해체 작업에 철수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후련하고 또 한편으로는 찜찜하다. 역대 정권마다 과거 청산을 수 없이 외쳐왔지만 언제나 말 잔치로 끝나곤 했는데 그나마 식민통치를 상징하던 옛 중앙청이 바로 눈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래도 후련한 맛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형 행사 말고 참으로 광복 50년, 분단 50년을 뜻있게 되새길 수 있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실로 어렵기에, 그저 빈 수레 요란한 것 같은 ‘유물 해체’에 멍청하게 들러리 서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뒷맛은 오히려 찜찜할 뿐이다.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고통,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기에 그 업보로 치르게 된 6, 25 동족상잔의 비극, 천사와 악마로 대비시켜 온 분단의 역사, 민족 구성원의 아픔을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권력 유지와 권력 재 창출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오기 십상이었던 남북 대화 20여년. 자본주의 실험과 사회주의 실험을 저 마다의 지상 목표로 신봉하며 조금이라도 그 궤도를 이탈할라치면 기관차 전복음모로 간주하여 온 철권 통치...이 모든 것이 광복 50년 8, 15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 우리 한반도의 자화상이며 본질적으로는 해방의 그 순간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텅 빈 반 세기 역사’의 현주소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이 정도면 살만하게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국민 1인당 GNP가 1만달러 수준에 이르고 있고, 김포공항에는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이 붐비고, 차가 차에 막혀 지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떻든 굶주리는 북한 형제들에게 ‘생명의 쌀’을 보내줄 정도가 되었고, 냉전체제의 붕괴로 불원간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운명의 한계가 도래하게 되면 결국 원하는 원하지 않던 통일도 앞당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극히 낙관적이고 여유있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성수대교 붕괴,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시 프린스호의 기름유출, 난장판이 되어가는 국내 정치 화해와 협력을 외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서로 트집 잡고 물어뜯기에 바쁜 남북관계 등을 대입시켜보면 그토록 낙관적이고 여유만만 할 수는 없다.
  개신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KNCC)는 이미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한 바 있다. 사실은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도 광복 50주년이 되는 1955년을 희년 또는 성년으로 선포 할 수 있었지만, 개신교에서 먼저 공표하는 바람에 기선을 제압당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의 조선기독교 연맹이 글리온 회의에 참석해서 희년의 의미를 흔쾌히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당국이 1995년을 ‘통일 원년의 해’로 삼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남한 당국이나 우리 교회 당국도 이러한 북한의 공세적 자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극적 자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진다. 그 결과 광복 50년은 말뿐이고, 실제로 1995년을 진정한 광복과 평화통일의 길로 열어 갈 수 있는 시원한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고 만 것이다.
  때문에 모처럼 KNCC와 북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합의한 판문점 남북 공동예배도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은 여러 경로로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등 모든 종단과 단체들이 모두 판문점에 모여 공동으로 광복 50주년을 행사를 갖자고 적극적으로 밀어 부쳤고, 통일원은 아예 처음부터 판문점 공동행사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못 박아 결국 8, 15 남북공동 행사는 소리만 요란할 뿐 실현성이 없는 공방이 치열하게 오고 가는 헤프닝에 그쳤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양측 정부 당국 간에는 정책 대결이 엄존하지만 가능한 한 민간 차원의 교류나 협력의 폭을 넓혀 점진적으로 양측 사회의 합리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던 동, 서독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남북관계가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 서독의 경우는 정부 당국이 직접 상대하기 어려운 일들을 종교 단체와 같은 민간기구가 떠맡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남북한의 경우는 민간 차원의 노력마저도 정부가 수용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부 간 대화가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광복 50년은 아무런 의미도, 역사적 무게도 지닐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아니면 정치적 상황 타개를 위한 폭탄선언이나 획기적 제스처로 또 한번 마음만 들뜨게 만들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우리 한국교회를 놓고 보면 의미 있는 변화가 눈에 띈다. 광복 50년을 KW는 금년에 접어들면서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발족되었고 매주 화요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뿐 아니라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민족화해학교’를 개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족화해학교는 분단 상황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 북한체제에 대한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며 통일을 위한 노력과 이를 준비하는 교회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룰 예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춘계 주교회의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가 공표, 발효될 수 있도록 조치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전 교회적 노력의 틀이 잡힐 수 있게 하였고, 추계 주교회의에서는 민족 통일에 대한 교회의 원칙적 입장을 천명하는 사목교서가 발표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교회 당국의 이 같은 노력을 앞서 나갈 정도로 일반 신자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통일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또는 정치적인 문제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통일의 궁극적 의미는 하느님의 백성인 한 형제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뜻한다. 그 삶의 주체인 우리 신자들이 이념과 체제의 벽을 넘어 복음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의지와 힘을 지니지 못한다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이제 분단 50년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통일 시대를 맞는 진정한 광복, ‘새 복음화’의 지평을 힘차게 열어 나가야겠다.


지 주교님 저는 아직도 부끄럽습니다.

임춘호 / 동림해운 대표(본회 회원)


  가신지 2년이 지났습니다. 이 땅에 남은 저는 언제까지 부끄럽게 살아야 하는지요. 1973년 처음 뵙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마지막을 뵈옵던 20여년, 주교님은 저의 가족에게 커다란 사랑이셨습니다. 지난 3월5일 베론으로 찾아뵈옵고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유택이나마 양지바른 곳에 계셔서, 많은 분들이 지금 아마도 영원히 주교님을 기억하여 드림을 위안으로 하고 천주님의 사랑으로 이제 주교님은 평안함 속에 계시다는 확신으로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진눈깨비가 쏟아지넌 1973년 어느 겨울, 서울 삼양동 산마루의 닭장 같은 집을 병약한 어머니와 급성간염을 앓던 남동생, 철없는 여동생과 함께 책 꾸러미와 가재도구를 가지로 언덕 위 공터로 쫓겨나던 날 주교님은 전보를 주셨습니다. 박 정권의 소위 유신이 모든 것을 어둠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 전 서울문리대 3학년이었습니다. 학업보다, 민주화 운동보다 제게 맡겨진 가족들의 생계유지에 허덕여야 했던 당시, 제게는 국가나 저 개인 모두가 한계 상황을 지난 시절이었습니다.
  주교관에서의 첫 말씀은 “사회 정의가..., 교회의 사명이..., 이 정권이...라는 말씀이 아니셨습니다. ”너 무얼 좀 먹어야 되겠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손수 주방에서 음식을 더 가져오시며 배불리 먹던 제 모습을 바라보시던 주교님, 준비하신 봉투를 손에 쥐어 주시며 ”이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며 열심히 노력하여 몇 배로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갚을 수 있다. 이것으로 우선 당장의 어려움을 덜도록 하여라. 며칠 후에 재학증명서 가지고 다시 와라. 외국에서 장학금 받아보겠다”고 하시던 주교님, 제가 시계가 없는 것을 보시더니 “공부하는 학생이 시계는 필요하다”하시며 가지고 계시던 시계를 채워 주시며 “열심 공부하고 노력하여라. 어려운 가정을 우선 돌보라. 비겁하여지는 이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저부터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고, 특히 배우지 못하고 어려운 이들을 항상 기억하라”하셨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제 인생의 지침을 주셨지만 주교님, 저는 아직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주신 돈이 산동네에서 방 한 칸 전세가 가능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로도 주교님은 저의 문안 편지에 반드시 회신을 주셨고 찾아뵌다고 전화드렸을 때 단 한 번도 거절하시지 않으셨사오며 그 때마다 용기와 희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항상 어려운 이들을 기억하고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부족하기에 주교님, 저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1974년 출옥하시고 바로 명동 성당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머리가 하얗게 변하셨던 모습에서 예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금년 3월 어느 피정에서인가 그 사진을 보고 복받치는 그리움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주교님은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끔씩 뵈오며 “주교님, 이제야 조금씩 갚아 드리게 되었습니다”하고 인사드릴 때 그 인자하시고 기뻐하시던 모습과 제가 80년 영세 시 본명을 “다니엘”로 하겠다고 여쭈었을 때 기뻐하시며 격려하여 주셨던 주교님, 저에게는 아버님과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1982년 인가 신문에서 주교님께서 급환으로 입원하셔서 위독하시다는 것을 읽고 정신없이 성모병원으로 가니 중환자실에 의식불명으로 계시다고 하여 입구의 락커에서 의사용 가운을 걸치고 무조건 병실로 들어가 보니 원주 교구에서 두 분이 자리를 지키시고 담당의사가 오늘 밤이 고비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주무시는 얼굴에서 검푸른 반점이 피어오르고 계실 때 너무도 기가 막혔지만 무엇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교구에서 오신 분께 여쭈었더니 최근에 한약을 드셨다고 하여 주교님 복부를 눌러보니 좌측하복부에 딱딱한 부위가 3~4곳 만져지기에 그 부분을 지압하고 전신지압을 약 1시간 하고나니 주교님께서 잠시 의식을 차리시고 “어떻게 왔어?”하시며 대변을 보시겠다고 하셔서 속으로 '분명히 회복하신다' 라는 생각으로 변기를 받쳐드리니 작은 달걀 크기의 매우 고화된 대변 3~4개를 보시고 다시 잠드셨습니다. 잠시 후 추기경님께서 문병을 오셔서 주교님 귀에 모리를 숙이시고 오랜 동안 간절하신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뵈러 갔을 때 주교님께서는 일반병실에서머리를 빗으시며 ‘오늘 퇴원하여 원주로 간다’하시며 밝게 웃으셨지요. 얼마나 감사 드렸는지요.
  부족한 탓으로 미국 이민 길에 오르기 전 찾아뵈올 때에는 이미 지병으로 시력을 거의 상실하셨지만 건강을 회복하셔서 미국 방문하시면 꼭 연락하시겠다던 주교님. 제가 귀국하여 주교님이 신림에서 요양 중이 실 때 온 가족들과 인사드릴 때 기뻐 하시면서도 “요즘 지주교가 변했다고들 하지...”하시면서 웃음 지시던 주교님. 그 뜻은 제가 잘 모르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간 너무도 힘드셨습니다. 누구인가가 주교님을 전적으로 대신할 수는 없어도 힘을 모아 주교님의 뜻을 계승하여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주교님.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쉬십시오.
  1995년 6월5일 서울에서 임춘호(다니엘) 배상


성역은 영원히 남아있다
명동성당 공권력 침투를 보고

  예상 못한 성역 유린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반 독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였다. 유신헌법은 그 법의 개정을 건의하거나 반대의사를 말하거나 그 말을 보도하는 것까지를 금지했다. 이 금지를 위반하면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4호에 의해 여행 구속하고 종신형 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가혹한 악법이었다. 이것은 1974년 7월23일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이른바 ‘내란선동’ 죄목으로 투옥되기 직전에 발표한 ‘양심선언’에 지적된대로 기본인권을 짓밟는 폭력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부처경찰서 권양 성고문사건과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는 시국 기도회를 열 수 있었던 곳은 전국에서 오직 명동성당 한 곳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추구된 정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이 결국 1987년 6월의 시민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군사독재 정권이 스스로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지향을 선언하도록 굴복시킨 역사적 대전환 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은 여러 차례 명동성당의 시국기도회와 민주화 운동권의 성당 내 농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양해해 달라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요청해 왔었다. “만일 그 때 우리가 공권력의 명동성당 투입 요청에 굴복했다면 6. 29 민주화 선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6월11일 명동성당 정오미사 강론을 통해 회고했다. 총칼과 장갑차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강탈한 군인들도 명동성당에는 함부로 침입하지 못했다. 침입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사전에 허락을 요청하는 인사를 차릴 줄은 알았다. 그리고 서울대교구장인 김 추기경이 허락을 하지 않으니까 침입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 그 군인들에게 무력이 없어서 못 들어온 것이 아니다. 또 국가의 어떤 법에 성당은 치외 법권이라는 조항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일은 자제했다.
  그런데 이른 문민정권이라는 김영삼 정부가 1995년 6월6일 새벽 한국통신공사 노조원들의 농성을 격파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예나 이제나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명동성당을 피난처로 택하고 있다. 사회의 일부 여론과 특히 중앙의 유력한 일간신문들이 사설란까지 동원하며 이론을 전개했다. “군사독재 아래서 민주화 투쟁을 하던 경우와 문민정부 아래서 노조쟁의를 하는 경우는 다르다. 지금 노조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어떠한가. 김영삼 문민정부는 군사독재 시절과 다르지 않게 노동정책에 잇어서는 강경 일변도로 임했다. 수많은 노조 간부들이 문민정권에 의해 구속되고 투옥되었다. ‘제3자 개입 금지’라고 하는, 외국의 노동법에서는 사례가 없고 국제노동기구에서 독소조항이라고 시정을 촉구해도 노동법은 이 문민정부 시대에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배후조종 세력이 있다”는 상투적인 논법으로 노조를 탄압해 왔다. 그리하여 이번 “한국통신 노조가 국가 전복을 음모했다”는 극언을 대통령이 직접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한국통신이라는 일개 특정 노조가 국가전복을 음모한 것이 사실이지.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인지, 그들의 음모가 사실이라면 그 뒤 정부의 수사당국은 왜 이 중대음모를 입건해 형사조치하고 있고 있는 것인지 일반 국민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말은 신중히 해야한다. 더욱이 한 국가의 통수권자 위상에서는 마땅히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현 문민정부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진실 되게 해결하려하지 않고 ‘사전 구속영장’을 남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진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통신 노조 임원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성당측으로서는 일방적으로 노조가 잘했다거나 두둔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노조 임원들로 하여금 대화를 통해 회사 측과 타협하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권고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약자라고 피난처를 구해 들어온 사람들을 교회가 “나가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1982년 부산에 잇는 미국문화원 건물에 방화한 김현장씨가 도피해 들어왔을 때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숨겨주었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동성당과 명동성당
  교회는 합리적인 해결을 주선했으므로 6월5일 저녁에는 한국통신 노조측의 서영길씨와 정부 정보통신부 경상현 장관 사이에 전화 통화가 이루어지고 6일 오전에 만나서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런데 6일 오전 8시에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해서 한국통신 노조 임원들을 연행해 갔다. 특히 이날 6일은 우리 민족의 근대 수난사 안에서 희생된 이들을 경건히 추모하고 묵상하는 현충일이었다. 하필 이날에 정부는 신중과 정직과 진실을 버리고 ‘법 집행’을 구실로 민주화의 성역에 폭력을 투입한 셈이다.
  “8년 전 6, 10 항쟁 때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가운데 현 정부의 관계자들도 명동성당에 와서 농성을 했으며 이러한 도덕적 힘의 결집에서 현재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정부는 명동성당을 성역으로 지키게 한 도덕적인 힘이 자신을 낳게 한 모태 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태와 같이 존엄한 곳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했다. 도대체 이 정부가 그럴 수 없고, 미사 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슬픈 일이며, 이 정부가 들어서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상상해 본 일이 없다.” 이것은 6월11일 명동성당 정오미사에 강론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이 토로한 충정이다. ‘슬픈 일’이라는 표현 대목의 억양이 실로 비감에 젖어 있었고 강론을 듣는 신자석에서는 손수건을 꺼내 눈에 대는 이들이 있었다.
  “도덕적으로 불감증에 걸린 정부가 앞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 해 갈지 염려 된다”는 것이 김 추기경 강론의 마무리였다. 실로 염려되는 것은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이 지지부진과 혼란을 되풀이 할 것 같다는 점이다. 가톨릭교회는 정치 현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포기하거나 중단할 수 없다. 현 문민정부의 공권력이 명동성당을 유린했을 때 전국 교구는 놀라움과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모든 교구에서 정부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사죄를 요구했다. 이 중에서 원주 교구의 대응은 가장 강력했다. 6일의 명동성당 유린 소식에 접한 원주교구에서는 다음날인 7일 오전에 사제총회를 열어 항의 성명을 채택하고 교구 차원의 다섯 가지 대응책을 결정했다.
  첫째, 교구 내 모든 본당은 일제히 “명동성당 난입한 문민독재 사죄하라”는 현수막을 게시한다.
  둘째, 성소 침탈에 대한 항의와 속죄의 뜻으로 6월12일 저녁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시국 기도회를 개최하고, 이어서 사제들은 단식에 돌입하기로 했다.
  언주교구는 12일 저녁 8시 원동성당에서 교구장 김지석 주교 주례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기도회가 끝난 후 사제와 신자들은 원주 시내 중심가 약 4킬로미터 구간에 걸쳐 촛불 시위를 벌였다.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이 이 시위 행렬에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1971년 10월5일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주례로 이 원동성당에서 “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기도회 참가자들이 원주 시내를 행진한 것이 한국 가톨릭 교회 사회정의구현 운동의 첫 횃불이었다. 이어서 이 횃불은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더 크게 타오르며 칠흙 같던 군사독재의 어둠을 불사르는 빛이 되었다.
  원동성당과 명동성당은 이 나라 민주화의 원류이며 본거지였다. 아울러 전체 한국 가톨릭 교회는 사회참여의 정당한 방향을 제시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르는 교회상을 정립해 나아가게 되었다. 자유와 책임의식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힘’에 의해 인간과 사회가 자기완성을 촉진케 하는 공동선의 성역이 바로 교회이다.
  현 문민정부의 정치 행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계속 혼란과 차질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중과 정직을 잃어 교만해지고 도덕성을 상실해가는 점이 전 국민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역사의 어려운 단계를 맞을수록 우리 사회에 반드시 남아이었어야 하는 도덕성의 성역이다. 한 때 허망하게 유린당하는 불행이 있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성역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있게 된다. 이 성역을 지키는 일에 우리 모두의 소명이 있다.  - 출판위원회 -


6 ․ 6 명동사태에 대한 원주교구 사제단의 입장과 대응 경과

배은하 신부 / 원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지난 6월6일, 이 땅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위 문민정부라고 자처하는 김영삼 정부가 온 국민들이 민주화의 성역이라고 인정하는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해서 피신하여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연행한 것이다. 꼭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현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에 이끌려지는 교만한 정부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사태가 여기에 이른 데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독설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문민정부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애국지사들의 엄청난 희생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16쿠데타 이후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군부독재 통치 아래서 얼마나 많은 선의의 국민들이 기본권을 유린당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피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화 운동의 모태로서 수 많은 민주인사, 노동자, 학생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곳이 바로 명동성당이다. 또 교회는 오랜 관례에 따라 화해와 중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 해 왔으며 어려움에 처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려고 노력 해 왔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존중해야 하는 그리스도 신자의 의무요, 이에 대한 실천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성역 없는 법 집행이라는 논조로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만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역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함께 지켜온 성역이라는 교회의 특권은 교회가 자신의 안전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마지막 피난처로 교회를 찾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한 거룩한 특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은 물론 군사독재 정권이라 일컬어지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에도 이 사회의 보잘 것 없는 이들의 피난처인 명동성당을 공권력으로 유린하지 않았다. 그런데 6월6일 명동 성당이 문민정부라 불리어지는 현 정권에 의해 무참히 유린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원주교구 사제단은 정평위를 중심으로 대책을 숙의하고 사태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즉각 사제총회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6월7일 11시 소집된 사제총회는 회의 직후 성명서를 발표하고 몇 가지 대응책을 결정하여 실천하기로 하였다.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구 내 모든 본당은 일제히 “명동성당 난입한 문민독재 사죄하라”는 현수막을 게시한다.
  둘째, 성소침탈에 대한 항의와 속죄의 뜻으로 6월 12일 저녁 8시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이어서 사제들은 단식에 돌입한다.
  셋째, 교구 사제단은 6월13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되는 ‘시국기도회’에 참석하고 향후 서울 등 전국 각 교구와 연대하여 대처한다.
  넷째, 교구 내 전 신자들은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6월12일부터 15일 풍수원 성체대회 때까지 현 정권의 도덕성 회복을 촉구하며 매일 묵주기도 5단이나 1일 한 끼 단식을 실천하도록 한다.
  다섯째, 6월11일 삼위일체 대축일 모든 미사 때마다 명동성당 사태의 경위 설명과 더불어 성명서를 낭독한다.
  긴급 사제회의 결정사항은 즉시 주교님께 보고되어 교구장 공문으로 발송되었으며 6월10일 교구 내 모든 본당에 일제히 현수막이 게시되었다. 당시 교구 사제단의 이름으로 밝힌 ‘명동성당 난입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는 “거룩함은 짓밟히고 힘없는 이들의 피난처는 유린당하였습니다” 라는 제하에 성역 없는 법 집행의 참된 의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법 집행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신성한 종교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광주항쟁이나 현 정권과 연루된 사건들의 수사가 성역 없는 법 집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역 없는 법 집행을 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사과와 노사 문제에 대한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 해 나갈 것을 촉구하며 인권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6월12일 예정대로 원동성당에서 제1차 원주교구 사제단 시국기도회가 교구장 김지석 주교님의 주례와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개최되었으며 미사 후 사제단을 선두로 원주시내 중심가를 돌며 촛불 침묵시위를 하였다. 사제들과 수도자 신자들은 사회정의와 인권옹호 민주화를 위해 군부 독재 하에서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이 투옥되시기까지 하며 어둠의 세상에 빛을 밝힌 것처럼 우리도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자는 각오로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이어서 돌입한 사제들의 단식 농성은 6월10일(토)까지 계속되었으며 15명의 사제들이 참여하였다. 단식 사제들과 신자들은 매일 저녁 시국미사를 봉헌하며 시민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였고 단식중이지만 13일 저녁의 명동성당 시국기도회에도 참석하였고 15일 목요일에는 풍수원 성체대회에 참석하여 4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현 시국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자 자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6월16일 저녁 8시 제2차 시국기도회를 원동성당에서 개최하였는데 단식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날 기도회는 원주 각 본당 레지오 조직을 통해 홍보하였기에 보다 많은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단식은 끝내지만 회개할 줄 모르는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며 지구별로 시국기도회를 계속하기로 하는 한편, 교구 사제단은 6월19일 춘천 교구의 교구 중장기 발전을 위한 연수를 마치는 6월22일(목) 제천지구 의림동 성당에서 제3차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촛불 침묵 가두시위를 하며 시내 중심가를 돌았다. 6월20일 명동성당의 2차 기도회 때 서울 교구는 더 이상의 회개를 기대할 수 없는 정부에 불신과 유감의 뜻을 전하며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화해를 위해 기도회를 일시 중단하겠다고 함으로써 잠정적으로 기도회는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현 정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온 국민과 더불어 교회는 보다 쇄신되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과제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중대한 사명으로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초대 교구장이신 지학순 주교님이 걸으셨던 모범을 따름이기도 하다. 우리 사제단은 함께 기도회를 하고 단식하는 동안 이러한 자신의 소명을 보다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되었고 자기를 비우는 가난함 속에서만이 고통 받는 자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최윤정 / 글라라(본회 회원)

  신앙을 가지면서부터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질적인 가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가지 책을 읽으면서 물질적인 가난보다는 영성적 가난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영성적 가난, ‘가난의 영성’이라는 것이 마음 속 깊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의 영성’에 대해 큰 메시지를 던져 주시고자 한 것 같은데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뜻을 같이하는 몇 개의 청년회 회원들과 천주교 도시빈민회에서 주최하는 ‘도시빈민 현장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3박4일간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 그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기 위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두 사람과 성북구...동에 배치되었는데 숙식은 ‘천주교 도시빈민회’ 회원들이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해결하고 체험은 각자가 알아서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날은 공부방 실무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잤습니다. 그 다음 날 일어나 그 곳의 주거 환경을 돌아보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보지도 못한 공동 화장실을 많은 가구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고 집들은 얼기설기 엉켜 있고 골목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틈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면서 직장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내가 구한 직장은 가내 수공업을 하는 어느 집이었는데 뜨거운 여름날 겨울 스웨터의 칼라 부분을 바늘로 꿰매는 일이었는데 한 벌 꿰매는 데 20원 정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루 종일 해도 100벌 정도 밖에는 할 수 없는 힘든 작업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그 곳에서 아주 큰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일이 믿어지지 않지만 다리가 불구인 가내 수공업을 하는 집주인의 머리 위에 강렬한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아주머니 이외에는 아무도 돈을 벌지 않았고 장성한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주머니에게 돈을 타 가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입가에 미소가 가실 줄 모르고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그 모습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주머니 머리 위에 비쳤던 그 강렬한 빛을 가슴 속에 품고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도시빈민 현장체험’ 프로그램을 마쳐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가정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가 현장체험 갔던 그 곳과 유사한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가난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주거환경이 너무나 열악해서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집에 있는 것을 싫어했고 계속 돌아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문을 활짝 열고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내가 새침떼기로 보였나봅니다. 여름이 오면서 너무나 더웠기에 나도 대문을 열어 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동네 사람 몇 사람을 집에 초대해서 커피를 대접했지요. 그 이후부터 동네 사람들은 저를 자기네 집에 초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초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왕래가 빈번하여 어느 집에 밥그릇이 몇 개,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다 아는 처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계속 눈만 뜨면 대문을 활짝 열었고, 다른 가정에도 수시로 방문을 했습니다. 이 동네 아저씨들은 대부분이 건축 일을 하는데 장마철이나 겨울철에는 일이 없어서 집에서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녁 무렵이 되면 다들 골목에 나와 없는 돈으로 돼지고기를 사고 소주 몇 병을 사서 함께 먹는 일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적으로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내가 그토록 찾던 ‘가난의 영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찾은 ‘가난의 영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일 값이 비싸 자식들에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과일을 사주면서 그 귀하디 귀한 과일을 서로 나누어 먹는 정, 맛난 반찬을 오래간 만에 마련하게 되면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느라 바쁜 사람들 고기라도 구워 먹게 되면 집에 초대해서 같이 먹는 정, 대문을 열어놓고 외출을 해도 도둑이 들어올 수 없는 동네, 아이들을 서로서로 돌봐 주는 정성, 그들에게는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닭을 한 마리 사서 식구들끼리 몰래 먹다가 들키면 무안해 하는 사람들, 초등학교를 중퇴했다고, 중학교를 중퇴했다고 부끄럼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 서로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마음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마음 넓기만 합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따듯함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직 탐욕이나 물질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당신의 모습이 살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도시빈민 현장체험’에서 체험했던 아주머니의 머리 위에 비쳤던 그 강열한 빛이 여기에도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은 느낍니다.
  ‘가난의 영성’이란 물질적인 것으로 마음이 차 있지 않은 상태, 즉 빈 그릇 같은 마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 서로서로를 섬기고, 아픔을 같이 해 줄 수 있는 마음이 그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아직 완전하게 ‘가난의 영성’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이 되는 모습을 보고 느꼈기에 언젠가는 완전한 ‘가난의 영성’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과 생명

이병철 /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 전국본부 기획실장(본회 회원)

  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자명한 것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농업, 농촌, 농민문제의 심각성과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농촌, 농업, 농민문제에 대한 우려의 소리 높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농촌을 살리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농업, 농촌 문제를 단지 관념적,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거나 다양한 여러 사회문제 중의 한 문제로만 국한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리는 있으되 문제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부족한 주된 이유이다.
  왜 농촌을 살려야 하는가. 긴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우리의 생명인 밥줄은 바로 우리의 농촌, 농업, 농민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농업의 위기가 곧 생명의 위기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잘나고 고상한 사람이라도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농업은 밥을 낳은 일이요. 생명은 밥에 달려 있으며, 그 밥을 낳고 마련하는 일이요. 생명은 밥에 달려 있으며 그 밥을 낳고 마련하는 일이 자연 생태계의 보전문제와 세상사의 이치를 살피고 바르게 하는 것에 직접 관계되어 있다. 명재식야요, 의식동원이라 했다. 밥을 떠나서는 건강은 물론 생명 또한 없다. 살아있음과 살아감이 모두 밥을 낳고 그 밥을 먹고 사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심각한 건강과 생명의 위기,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병리현상 등은 모두 그 원인이 밥의 위기 곧 농촌, 농업, 농민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농업, 농촌은 막다른 위기 속에 놓여 있다.

  농업, 농민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농촌, 농업, 농민이란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 인식하는 일이다. 농업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여 농업을 전체 산업의 한 부분으로 보는 인식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농업, 농촌문제를 산업 문명 모순과 생명위기 극복을 위한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때 그 자리에서 우리의 농업은, 농촌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을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살기 위해서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자리인 환경 생태계의 회복과 창조질서의 보전은 농촌, 농업을 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인식과 자각 없이는 농촌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농촌, 농업, 농민이란 무엇인가.
  농업은 생명산업이다. 농업은 농민의 생업이기에 앞서 온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며 공업 원료를 생산하는 국민경제의 기초산업일 뿐 아니라 환경생태계를 지키고 가꾸는 환경, 생명산업이다. 그러므로 농업은 단순한 일차산업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협력하여 하느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생명의 종합 산업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생명창조의 역사이다. 농촌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 공생하는 생명의 터전이며 생태계의 보금자리이다. 일과 놀이가 삶과 의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농촌은 민족문화의 뿌리이며 모든 이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국민의 보건 휴양지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생명인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은 대지를 지키고 가꾸며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생명의 일꾼이며, 민족의 삶과 정서를 계승시켜나가는 민족의 뿌리이며 어머니인 것이다. 이 같은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만 그 동안 산업사회에서 잘라버려야 할 맹장처럼 취급되어 온 잘못된 농업 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농촌이 살아날 수 있는 근거를 힘있게 마련할 수 있다.

  도, 농 공동체의 활동만이 농촌을 살릴 수 있다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은 한국천주교회가 중심이 되어 UR협정 타결로 더욱 심각한 어려움 속에 빠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실천적 대안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지난 해(‘94년) 6월, 전국본부의 결성으로 출범된 이 운동은 1차적으로 UR 유예기간이 완료되어 쌀 수입이 본격화되는 2004년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집중적인 노력을 통하여 농업발전 기반의 조성과 생활 실천운동의 모범을 만들어 내는 것을 1단계의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운동의 핵심은 도시와 농촌의 생활 공동체의 형성과 활성화이다. 지금 우리 농촌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UR타결 이후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에선 농촌희생을 위한 정책적 노력도 실제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농민 또한 자생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이다. 이제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물 밀 듯 밀려오는 유해한 수입 농산물의 홍수 속에서 밥상을 지키고 우리의 농촌과 농업을 지키는 일은 결국 도시의 소비자들이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비자들의 각성과 이에 바탕한 도, 농 공동체 운동만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인 밥상을 지키고 농촌을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인 생명의 밥을 중심으로 도시와 농촌이 서로 공동체로 연대할 때만 우리 농촌은 살아날 수 있다. 오늘날 농업, 농민이 처한 어려움은 비단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농촌을 살리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살리는 것이라는 도시 소비자들의 자각과 실천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자 농민 공동체와의 생활과 생명의 상호연대, 그 의탁관계가 우리 농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이란 곧 노, 농 공동체 운동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10년 동안 구역, 반 활동을 기본단위로 한 도시본당 중심의 소비자 생활 공도오체를 조직하고 동시에 공동 생산과 운영을 기본으로 하는 농촌의 생산 공동체를 조직해서 농촌 생산자 10~20여 가구가 도시 소비자 500~1,000여 가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300여 도, 농 공동체 결성과 연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수입 농산물과 오염된 가공식품 대신 안전한 생명의 먹거리로 도시 생활공동체 가구의 밥상을 70% 이상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기초한 조직적 역량은 물론 그 간의 가톨릭농민회 활동, 우리 밀 살리기 운동, 한 살림 운동, 생협활동 등의 경험과 사례들을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 농 운동과 교회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의 조직적 기반은 교회이다. 왜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지 않으면 D나되는가. 교회가 믿음과 생활의 일치를 통하여 이 땅에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한다면 우리 교회의 최우선적 선택은 오늘날 농촌, 농민이 될 수밖에 없다. 농민이야말로 자연을 돌보며 생명을 섬기고 가꿈으로써 하느님이 창조 사업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생명의 일꾼이면서도 이 시대 가장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농촌을 살려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위기에 처한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도시와 농촌의 공동체 형성과 이의 연대는 공동체다운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연의 의무이자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반 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인 공업화 중심의 현대 산업 문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교회의 21세기를 향한 사목 방향과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포함한 생태계, 생명계 전체의 위기로부터 생명근원과 해방을 이끌어 내는, 모두를 살리고 더불어 사는 생명공동체의 실현이어야 한다.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은 바로 이 처럼 교회가 지향하는 21세기의 창조질서 보전과 생명의 질서 회복을 위한 중심사목 과제인 것이다. 이제 교회가 선언하고 시작한 이 운동은 한국천주교회사의 대 사회적 책무가 되었다. 이 운동을 책임 있게 실현하는 것은 교회의 사목적 과제일 뿐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시작된 이 운동은 그 동안 각 교구 단위로 우리 농 교구 본부의 결성(6개 교구 등)과 우리 농 학교의 개설, 직매장 설치, 운영 등 운동의 터전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농민 주일의 제정 등 교회의 공식적인 노력과 함께 현장의 생활공동체를 구성하여 도, 농이 얼굴을 맞대고 삶을 직접 나누는 일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은 도덕적 당위나 이념의 주창에 머무는 운동이 아니다. 이 운동은 구체적 생활실천 운동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도시와 농촌이 함께 밥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운동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의 밥상부터 바꾸는 운동이다. 지난 7월13일 우리 농 설립 1주년 기념 미사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주교관의 부엌과 각 본당 사제관의 부엌에서부터,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각 가정 그 부엌에서 유해한 수입 농산물을 대신 우리 농촌에서 생산된 안전한 먹거리로 생명의 밥상을 마련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ALE습니다. 이것이 곧 생활 실천 운동이고 우리의 믿음을 구체적인 삶으로 일치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그렇다. 밥상의 변화가 삶의 변화의 근본이다.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은 밥상과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다.


오늘 당신이 가시는 날

신동민 /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

  한 많았던 시간이라 말하지 않으오리라
고통 속의 시간이라고도 말하지 않으오리라
오늘 당신이 가시는 날!
허나 살아 온 역사 깊숙한 곳으로부터
숨 쉬던 맥이 끓기는 듯 하더이다.
당신의 가심
마치도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스러지는 듯 가슴이 떨려옵니다.
그러나  한 역사의 꽃잎이 떨어져 묻히는 오늘
당신의 시간 속에 함께 한 우리는
이 메어지는 가슴을 조심스레 진정시키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께서 품으시고 가시는 그 마음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렵니다.
저녁 무렵, 한 송이 꽃잎이 스러져 갈 때
그 가슴에 품은 씨앗은
다음 날 가슴을 지닌 이 시대의 더 많은 꽃을 잉태하심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교님!
당신의 가시는 길 앞에 선 우리는 섧다 울지 않으렵니다.
단지 당신의 삶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에
오늘 귀 기울이고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들으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살렵니다.
답답해 하셨던 시간들 속에서 주님의 뜻 이루시고자 몸부림치셨던 그 모습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들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당신을 보내며, 당신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발탄의 불행

유용선 / 시인(본회 회원)

  오늘은 백발백중이다. 군 복무 기간 중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사격장이나 경계근무를 설 때에 실탄을 소지한 군인의 실수로 쏜 탄알은 반드시 사라에게 날아간다 해서 그 말이 왜 민간인이 된 지금 커다란 무게로 다가오는지...
  언어도 마치 총알 같아서 실언-언어의 오발탄-은 백발백중 사람에게 날아가 그의 상처가 되고 만다. 입이라는 성능 좋은 총으로 우리는 서로를 쏜다. 빗나간 총알은 차라리 아무것도 맞히지 않고 그냥 땅 바닥에 떨어져 주면 좋으련만 무방비의 사람에게 날아가서 조준한 것보다 정확히 그의 급소를 명중시킨다. 무심코 뱉은 말이 그녀의 혹은 그의 귀를 통해 들어가 마침내 심장에 타격을 입힌다. 미움, 실망, 시기, 혐오 등의 감정이 아주 짧은 순간 너와 나 사이에 놓이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벽이 된다. 이제 ‘너’와 ‘나’는 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된다. 보았어도 본 것이 아니고 만졌어도 만진 게 아닌, 어찌 보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다. 우리 모두 한 번 이상은 겪었을 오발탄의 불행이다.
  내 기억 속엔 어쩌면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허공에 대고 난사한 탄환이 고스란히 한 사람의 가슴에 쏟아진 적이 있다. 비록 철없는 시절의 일이지만 가슴에 쏟아진 적이 있다. 비록 철없는 시절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지독한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내가 대학 입시에 낙방을 했던 해였다. 초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 앞에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다 한 여학생의 이름이 나오자 그 때부터 몇 분에 걸쳐 그 학생을 비난했다. 여학생 수석을 다투던 키도 크고 예뻤던 그 아이는 그 당시 소위 평범한 수준의 대학에 입학해 있었다. 그 점이 내겐 불만이었다. 중고생 시절 단지 여느 여학생들처럼 적당히 공부를 하고 문학이니 음악이니 여행이니 다양한 과외활동을 하다가 그 소위 평범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고 그녀의 그러한 점은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비난받을 일이 못된다. 그러나 그 시간 그녀는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을 통해 숫제 평범 이하의 불량한 여학생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녀는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왜 그랬을까? 그 옛날 어릴 적엔 내심 좋아하기도 한 그녀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는 마음의 상처만을 안겨주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선 한참 울었다지. 너무 창피하고 억울해서 죽고만 싶었다지. 그래, 그랬을 거야. 그 때만해도 청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직 어릴 때였으니까. 난 지금, 다시금 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자기 환멸을 느낀다.
  오발탄의 불행은 그것을 쏜 사람과 맞은 사람 모두에게 오는 것이다. 나날이 무디어지는 우리의 심성은 차츰 그 불행을 불행이라 느끼지 못하기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바라건대 이후로 내게는 맞아서 생기는 불행만이 있기를....말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너다닌 끝에 처음 목표 한 곳으로 가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데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그것을 쏘아 보낸 사람에게로 살기등등한 모습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모습의 오발탄은 우리 생활 곳곳에 있다. 인연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무수히 모습을 바꾸는 너, 백년 묵은 여우 보다 더 요사스런 ‘말’이여! 외면당함보다 더욱 당혹한 일은 오해를 받음이다.
  이따금 마음의 허허로움을 위하여 성인전이나 묵상록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속에서 침묵이란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옴을 보고선 놀란다. 지금보다 훨씬 인구도 적고 따라서 언어의 오발탄도 적었을 시절에도 역시 말이란 위험한 것이었나 보다. 가축인 말이야 재갈을 물려 길들일 수 있지만 발 없는 말은 재갈을 물릴 수 없는 법이다. 세상에 제 입과 세치 혀로 오발탄을 쏘지 않으며 사는 자가 어디 있을까? 사람으로 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솟아오른다. 내일은 성당에 가서 단 삼십분만이라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해야지. 길지 않은 글을 쓰는 동안 어느덧 밤이 제법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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