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1 18:00:12, Hit : 5057
 들빛회 소식지 제6호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에언자의 소리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회보 제6호

정의가 강물처럼

지 주교님의 일생을 생각하며

김승훈 신부 / 여의도성당, 본회 자문위원장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의 은혜를 받아 세상에 태어납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일생을 살고 나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으므로 해서 각기 다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잘 살기도 하고 잘못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내려 주시고 또 은혜로이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성실하게 따라 살았는가 하는 데에 달려있다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그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각기 다른 사명을 분명히 깨닫는 사람만이 참으로 인생을 잘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故 3주기를 맞으신 우리 지학순 주교님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우리 주교님께서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사셨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예언자를 보내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일제치하의 온갖 민족의 수난을 젊은 시절에 다 겪으셨습니다. 남과 북을 오르내리시면서 신학생 생활을 하셔야 했고,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아주 늦게야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와중에 시작하신 사제 생활은 한마디로 하루하루가 제물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마흔 살이 다 되어서 유학을 하심으로써 지도자의 수업을 마치시고 얼마 후에 주교로 성성 되셨습니다.
  그러나 주교님께서는 광야와 다름없는 강원도 허허벌판에서 당신의 사목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으며, 어디에 의지할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 가운데 당시의 시국은 참으로 험난하였습니다. 소위 유신시대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많은 이웃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경제성장이라는 미명아래 엄청난 부정과 불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외치셔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안일함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부귀와 권력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을 때 하느님의 예언자는 말합니다. 현세적인 물질과 권력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때에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교님의 이 정의로운 외침과 행동은 악의 권력으로부터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악의 권세로부터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십자가 위의 주님을 본받는 오직 하나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괴로움보다 주교님께서는 더 절실하게 마음으로 겪으신 고뇌가 훨씬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지주교님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로서 참으로 훌륭한 일생을 살으셨던 우리 모두의 존경하올 주교이셨습니다.
  오늘 故 3주기를 맞으며 하늘에 계시는 주교님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4월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시인이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대목이다. ‘4월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1960년 4, 19 혁명은 민주혁명의 순수한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역사에서 4, 19혁명은 고목의 뿌리에서 새 순이 솟아난 생명의 사선이다.
  이것은 하나의 싹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싱싱한 물푸레나무 가지로 자라나 보리타작하듯 민족사의 알맹이를 수확한 감격이었다.
  그것은 젊은 학생들이 시위만이 아니었고 온 백성이 함께 맨손으로 들고 일어나 중앙권부(權府)를 물러나게 한 우람한 힘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5, 16 쿠데타 군인들이 나타나 총칼로 보리타작의 도리깨를 빼앗아 갔다.
  이것은 실로 하늘의 벌을 받을 일 이었다.
  그 죄로 인해 30년 군사통치의 부끄러운 세월이 이어졌다.
  이제 이 달 4월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처음 맞이하는 국회의원 총 선거가 실시된다.
  모처럼 민족정기의 알맹이들을 골라야 할 마당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마당에는 쭉정이와
깜부기들까지 많이 널려 있다.
  이제 물푸레나무들은 다시 일어서자. 우리는 힘찬 도리깨가 되어 민족정기의 알맹이들을 알뜰히 수확하자.
  생명의 씨알만이 끝끝내 우리의 소담한 희망이다.


수녀가 된 ‘4, 19세대’

봉천동 ‘만남의 집’ 운영하는 양 마리비안네 수녀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법정에 선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낳은 학생-양심수들이 섰던 자리, 그 이전에 혹은 그 이후로 하루하루가 살기 어려워 잘못을 저질렀거나 사회를 저주하며 인간을 미워했던 흉악범들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선두 중년 사내의 뒷모습은 과연 그들이 그때 그 사람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아직도 떨어진 별들과 당당하게 악수를 나누고 포승과 수갑 없이 호송버스를 탈 수 있는 시들어가는 위세를 과시했지만 그들을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왔던 어떤 미친 시대의 씁쓸한 잔영을 되씹으며 혀가 꺼끌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오후 조용한 혜화동 성당 마당에서 양 마리비안네 수녀(55)를 만났다. 양 수녀는 4, 19때 대학 1학년생이었고, 대학 졸업 후 수도자가 되었다. 돈암동, 성남, 인천, 반월공단 등지에서 노동사목 활동을 하다 최근에는 봉천동에서 결손가정 어린이를 돌보는 ‘만남의 집’을 운영주이다. 4, 19를 생각하며 그를 만난 것은 ‘의거’로 격상된 요란한 4, 19정신의 계속과 적자(適者) 논쟁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화두(話頭)를 쫓아가는 일관성 때문이다.

  양 수녀님은 4, 19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때 막 입학한 1학년이었지요. 고대 교육심리학과에 입학했는데 전날(18) 같은 과 남학생들이 데모를 하러 나갔다가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고 돌아왔어요. 입학선물로 받은 시계를 뺏겨 돌아온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동원된 깡패들 짓이었지요. 19일 날 용두동 언덕의 둑길을 쳐다보니 옆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나가면서 “형님들 빨리 나갑시다”하며 소리 지르는 것이 보여요. 오전 9~10시경에는 서울 상대 학생들도 나가고요. 햇볕이 내려쬐는 가운데 동기들과 걸어서 광화문 국회의사당까지 갔죠. 지금은 복잡하지만 당시만 해도 넓었던 길 위에 주저앉아 고함을 질렀죠. “이 박사 물러나라”고

  시민들의 반응도 호의적 이었다지요
  굉장했죠. 아줌마들은 양은그릇에 물을 떠가지고 와 목마른 학생들을 먹였고, 어디서 돌기 시작했는지 사과와 담배가 나뉘어졌죠. 그러고 있는데 파란하늘을 깨는 듯 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머리에 피를 흘리는 몇몇 학생들이 뛰어가 경무대로 가자고 소리를 질러요. 당시 시위대를 이끌던 학생들이 그때 경무대로 갔다면 희생이 많았을 거예요. 총소리가 계속나자 여학생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더군요.

  그 총소리가 역사의 한 장을 여는 거라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솔직히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어요. 그저 무서웠고 같이 서울서 학교를 다니던 오빠와 여동생이 걱정됐지요. 그날 밤 서울 법대를 다니던 오빠는 결국 집에 안 들어와 밤새 격정을 하게 만들었죠. 알고 보니 옷에 빨간 물감(당시 시위학생을 잡기 위해 시위대에 빨간 물감을 뿌렸었다)이 들어 광화문 친척집에 숨어서 그날 밤을 보냈다더군요.
  양수녀는 74년 종신서원을 하며 해방자 예수의 모습을 따라 살 결심을 했다고 한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예수를 추종하는 희생의 삶이 수도생활에 든 자신이 가야할 길로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기 위해 84년부터 돈암동, 반월공단, 성남 등지에서 노동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86년에는 수녀원의 허락을 받고 수도복을 벗고 인천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아줌마라 써주는 데가 없더라구요. 겨우 사정해서 방위 산업체의 철물 닦는 일을 하나 맡았죠. 철을 다루는 데라 힘쓰는 젊은이들과 섞여 아줌마 둘이 함께 일을 하게 했는데 나중엔 정이 들고 서로를 아껴주게 되었어요. 위장이 약한 한 아줌마에게 지어온 위장약을 건네주자 저보고 ‘자기 병 고쳐주려 이리 오게 됐나보다’며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나요.”
  지겹게 힘든 일을 하다 고정직으로 전환시켜 줄테니 이력서 가지고 오라는 말에 그만두고 이웃한 봉제공장의 미싱시다로 옮겼다.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어놓고 고개도 돌이기 못하게하는 감옥 같은 분위기에서 일했다. 같이 들어간 열여섯 난 시다는 매일 울기만 했다.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얘기 아시죠. 부잣집 문간에서 구걸을 하던 나자로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나자로는 천국으로 가고 부자는 지옥으로 갔다는 성경말씀, 부자가 애 지옥으로 갔습니까, 부자는 나자로를 때리지도 내쫓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나자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지요. 믿는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헛 믿고 있는 거예요.
  
  4, 19가 격상되고 최근 들어 그날이 오면 묘지에는 높은 분들이 보낸 화환으로 꽃단지가 됩니다. 감회가 어떠십니까.
  매년 묘소를 찾아가다 최근 들어 안 가보게 됐어요. 아마 높은 분들이 찾으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좋아진 게 뭐 있나요. 이 땅에 민주주의하자는 주장이 4, 19인데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되었다고 국민들이 공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다짐들을 하고는 있으니 그런 측면에서는 좀 발전됐다고 할 수 있지요.

  말 나온 김에 전직대통령 구속에 관한 소감은 어떠십니까.
  구속은 당연히 찬성합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반대해요. 처음엔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다가 갑자기 법에 넘겨버린 건 선거에 이용할 업적 만들기 아닌가요? 역사를 위해 전직대통령의 비행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이이을 위해 이용한다면 결과는 늘 비슷 할 겁니다. 어제 심문 내용을 보니 두 전직대통령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더군요. 6, 25때 한강다리를 자른  사람도 밝혀져 처벌을 받았고 4, 19때 총 쏘라고 명령한 최인규 내무장관도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주의 발포 명령자는 없는겁니까? 물론 저는 사형반대론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극단적인 형을 선고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릅니다”,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줄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모습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왜 솔직히 발포명령을 내렸다는것을 얘기하고 당시 나라가 위험에 빠져 쿠데타를 했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까.

  노동사목을 하실 때 알던 많은 분들이 이번에 총선에 출마합니다. 그들은 야당으로도 나서지만 여당으로도 나섭니다. 누굴 어떤 기준으로 뽑아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잘 알던 사람들이 이번에 출마합니다. 여당으로 나간 사람도 있고, 미리 알았으면 말렸을 텐데, 요즘은 한번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치를 불신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뽑아 그 자리에 앉혀놓아야 하니까요. 그거 안 먹고 깨끗한 사람, 제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을 뽑는 수밖에요.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야당 중에 뽑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야당 중에서도 많은 수는 정치꾼에 불과하지만 왜 꼭 야당 중에 뽑아야 하는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양수녀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를 잘 알았기에 참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믿음을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살면 사회는 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선출한다면 더 더욱 바랄 나위 없겠지요.”
  모든 종교인이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하자는 것이다. 다소 엉뚱한 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웃으며 그는 “기도하면 못 먹으니 음식을 덜 낭비하며 쓰레기를 줄일 것이며 가만히 앉아서 좋은 생각하니 깨달음이 생겨 실천할 것이니 이 모든 것이 환경보호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보이는 장애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참 모습입니다.

이찬근 / 울타리 공동체 원장

  소외된 침묵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장남인 나에게 각별한 기대와 꿈을 가지게 되셨으며, 공부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출세해야 집안의 가풍을 세울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으로 인한 어머니의 고생은 주름살만 늘어갔으며, 그런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얼른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지 하는 생각이 청년시절 나의 전부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1980년 봄 삼육재활원(장애인 특수학교 및 병원)에서 접하게 된 새로운 변화는 나의 삶에 많은 번민과 갈등을 가져오고 말았으며, 그 곳에서 만난 장애인들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청년시절 꿈꾸던 나와 어머니의 바램들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급기야 새로운 방향으로 나의 삶을 바꾸어 놓고야 말았습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은 변함없는데 내가 아닌 타인의 장애로 인하여 갈등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무능하다고도 느꼈고 그들의 침묵을 외면하거나 비켜갈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 한심하다고 생각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만의 장애와 침묵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 16년 동안 삼육재활원에서 알게 된 어려운 제자들과 제 주위에서 소외당한 지금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하느님 곁으로 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나의 손을 꼭 쥐면서 고맙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무엇이 고마우셨다는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하기를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 이런 사람들과 살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 등등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땅히 답변할 말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냥 팔자지요, 뭐” 하고 대답한 후 웃고 만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장애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누구인가의 고통을 대신 겪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존재하기에 이 사회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으며, 특히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가장 큰 이유도 소외된 이웃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현재 울타리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들은 정신지체와 장애와 중복장애를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가진 식구들이 대다수입니다.
  삼육재활원에서 만난 지체 장애인들은 장애인 체육을 열심히 하여 역도와 탁구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으며 96 아틀란타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약 5년여의 재활교육 과정을 거친 후 95년 10월9일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능안리 73번지에 조립식으로 공동체의 집 48평을 신축하여 입주하였습니다. 올해 부터는 지금까지 5년 동안 배운 조각과 농사를 지으며 자립할 예정입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이곳 생활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행복의 공간을 우리 장애인 식구들이 나에게 선물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봄기운을 완연히 느끼게 하는데 추운 겨울동안 집안에서만 생활하던 우리 식구들이 봄과 함께 자립을 위하여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동네 주민들과의 마찰은 어떻게 비켜갈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건강한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 통에 살고 잇는 그들에게 최소한 우리는 따스한 눈길만이라도 보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장애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공명선거, 이렇게 하겠다.

  편집자 주
  ‘정의가 강물처럼’ 편집인은 ‘4월을 생각 한다’는 이번호의 주제를 놓고 4월 총선에 임하는 각 당 정치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임의로 추출된 의원들은 각 질문에 비교적 성실히 답변을 해 주었다. 다음은 질의서 내용이다.

  1.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공명선거의 개념은?
  2. 학연, 혈연에 호소하고 특히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현 정치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여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전직 대통령의 구속 등 일련의 과거사 청산작업이 이번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십니까?
  4. 우리 현대사에서 청산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과 계승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손학규 의원(신한국당)
  1. 모든 유권자들이 스스로 강압에 의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했다고 느끼는 분위기에서 축제처럼 행해지는 선거입니다.
  2. 문제가 되는 것은 유권자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관습과 제도입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의 변화, 즉 세대교체를 통해 새롭고 건전한 정치 행태는 충분히 창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역사 바로 세우기는 선거와 연계된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 민족 자긍심 고양을 통해 21세기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선거에 대한 영향은 이러한 큰 줄기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4. 각각의 시대에 적합한 역사적 징표에 무엇이 부응했는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청산과 계승을 해석해야 하며, 사실에 대한 상대적 판단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 탈이념, 무 국경의 무한경쟁시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삶의 기준이 되는 21세기에 대한 비전,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진 정치인을 선택해야 합니다.

  김상현 의원(새정치 국민회의)
  1. 공명선거는 운동경기의 페어플레이를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는 룰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공명선거를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헌정사상 언제나 여당이 정치자금을 거의 독식해왔다는 점과 언론의 불균등 보도를 들 수 있습니다.
  2. 한국 정치의 가장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느 후보들에게도 마찬가지 문제라고 봅니다. 특히 현 집권당은 90년도 벽두에 민정, 민주, 공화당이 3당 합당을 해서 이른바 호남을 고립시키려는 망국적인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오늘날 지역감정 문제의 이와 같은 본질은 덮어두고 힘없는 야당 지도자에게만 덮어씌우려는 언행은 오히려 또 다른 소외지역의 감정을 부채질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3. 김영삼 정권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5, 18 공소권 없음’이라고 해 놓고 김대중 총재 복귀 후 느닷없이 두 전직 대통령을 잡아들였어요. 그래서 국민들은 혼란을 느끼는 것이며 특히 대구, 경북 지역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한 것입니다.
  4. 역사는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부단한 이어달리기죠. 때문에 역사의 청산이니 단절이라는 말은 또 다른 언어의 폭력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런 말 대신에 역사와 민족정기의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5. 당연히 문제의 핵심은 말의 성찬이 아니라 공약과 비전에 대한 실천의지와 실현 가능성이죠. 따라서 판단의 1차적 기준은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앞으로 역사와 국민의 편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길재 의원(새정치 국민회의)
  1. 관권, 금권의 개입이 사라지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통한 유권자의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선거라고 봅니다.
  2. 지역감정은 역대 집권당이 조장하고 이용 해 왔습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집권당의 행태가 중지되고 정책대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3. 과거사 청산 작업이 현 정권의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왜곡된 만큼 올바른 과거 청산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4. 권위주의적 군사 문화가 청산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와 정치 발전을 위한 전 국민의 헌신적인 노력이 계승되어야 합니다.
  5. 정당의 정책, 정당의 역사적 정통성, 후보의 자질 등이 판단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부영(민주당)
  1. 공명선거란 간단히 말해 유권자가 후보자의 인물과 소속정당의 정책을 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분위기가 갖춰진 선거를 말합니다. 따라서 금권, 관권, 지역감정을 공명한 선거분우기를 해치는 3대 장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역할거 정치의 벽도 겉으로는 강소해 보이지만 이미 그 붕괴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경우 지역감정이나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국민들은 일련의 과거 청산 과정에서 누가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이를 왜곡해 왔는가를 생생히 보았습니다. 이제 유권자들은 그것을 투표로 확인 해 주어야 합니다.
  4. 건국 과정에서 불철저하게 이루어진 일제 잔재, 냉전 시대의 산물인 다양한 형태의 냉전 이데올로기와 그에 입각한 제도들을 시급히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면 4,19,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통해 면면히 내려온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는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우리 국민 모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경제성장의 역사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5. 물론 인물과 정당의 정책입니다. 특히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후보나 정당에는 절대로 투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느 정당이 정말로 개혁을 이룰 의향과 능력을 갖고 있는가도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정구 의원(민주당)
  1. 단순히 돈이 적게 드는 선거만 가지고는 공명선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공명선거의 최종목표는 가장 좋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정책과 인물을 놓고 경쟁을 벌일 때 온전한 공명선거가 될 것입니다.
  2. 그 동안 우리가 진정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정치가 아니라, 3김 정치의 대안세력 부재라는 역사적 한계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3김이 사라지고 난 후 그 대안세력이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3김의 그릇된 정치 행태에 줄기차게 대항하면서 대안세력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3. 과거사 청산 작업이 현 정권의 정략적, 자기 인기관리 차원에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홈런을 치고도 득점을 못 올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4개 정당간의 차별성이 별 영향을 미칠 변수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4. 요컨대 우리의 청산 대상은 30년 군부독재가 남긴 해독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역주의입니다. 4월 민주혁명의 정신은 오늘날 국민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내용적 민주주의로 계승, 발전되어야 하며, 지역감정은 그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5. 총선은 국회의원을 뽑는 것인 만큼, 4년 동안 국회에서 성실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인지, 그리고 소속 정당이 우리의 정치를 더 정의롭고 깨끗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지가 판단의 기준입니다.7

  강신옥 의원(무소속)
  1. 돈 안 쓰는 선거가 바로 공명선거라고 봅니다. 선거법에 규정된 것이 비록 지키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정치 지도자인 후보자는 현실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을 이끌어서 선거법 이상으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2. 현실에서는 상당히 그런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도 역시 정치 지도자들 내지는 여론을 이끌어 주어야 할 지식인들의 사명이 크다 하겠습니다.
  3.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야에서나 야당이 주장하던 것을 대통령이 수용한 것은 큰 결단으로 평가 받을 일이긴 하지만 이것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지금까지 잃었던 신뢰를 회복했다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친일 잔재의 청산과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청산되어야 할 것이며, 계승되어야 할 것은 민족정기의 회복이라고 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하여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나 청산되어야 할 과거에 협력하였거나, 반민족 행위를 하였거나, 반 민주노선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청산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5.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 깨끗한 정치인, 개혁지향적인 정치인, 그리고 그 사람이 걸어온 과거에 대한 평가와 경륜이라고 봅니다.


기도와 평화적 설득이 강압적 방법 결국 이겨…

  이 글은 김녕 정치학 박사의 저서 중 한국정치와 교회-국가 갈등(소나무출판사)의 내용 일부입니다. 본회 편집위원회는 김녕 박사의 양해 하에 지학순 주교 사건에 관한 글을 싣습니다.

  1974년 7월6일,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체포되어 한국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거기서 그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민청학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요 기소사유는 지주교가 민청학련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었다. 김추기경이 7월8일 중앙정보부로 지주교를 방문했을 때 지주교는 민청학련이 공산주의 단체와 관계가 전혀 없으며, 그가 민청학련 학생들을 지지 한 것도 용공 행위가 아니었음을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1974년 7월15일 발표한 성명에서 지주교는 자신이(가톨릭 저항시인인 김지하를 통해) 학생들에게 돈을 준 거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기금” 으로서였다고 말한다.
  지주교가 체포되고 나서 교회는 즉각 대응조치를 취했다. 그 다음날 지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모임이 조직되었다. 7월9일 김추기경은 한국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 다음날, 주교회의는 회합을 열었고, 저녁 미사 중에 ‘지학순 주교에 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7월23일 지주교를 가석방 기간 중에 양심선언을 발표하여 유신체제를 “국민의 불가 양도한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짓밟는… 가장 참혹한 기본권 유린”이라고 비판하였다. 지주교는 그날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 두 번째 체포소식에 접한 교회는  명동성당에서 7월25일에, 원주교구에서는 7월30일, 대전 교구는 8월5일에 각각 대규모 미사(1,000~2,000명 참여)를 집전하였다. 이 미사들은 정의를 위해 투쟁하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비슷하고 고통을 받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봉헌되었다. 마침내, 8월6일,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지주교가 체포된 사건을 공식적으로 자세하게 밝혔으며 정부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반박하였다. 그렇지만, 지주교의 체포에 대한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대응은 7월10일의 ‘지학순 주교에 관하여’라는 명칭의 성명서에서나 8월6일의 ‘지주교 사건에 대한 해명서’에서 처럼 불충분하였다. 어느 성명서도 이 사건을 다룰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시 못했다.
  교회는 지주교를 위해 단지 성명서를 내고 기도모임을 여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교회 내에서 국가의 압력에 대항해 나갈 보다 적극적인 주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지주교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정의로운 학생, 지식인, 종교 지도자들이 투옥되었거나 투옥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모든 교구의 사제들은 현 사태에서 교회가 이러한 불의에 대항하여 강력한 발언을 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 이후, 8월26일 각 교구를 대표하는 약 60명의 사제들이 답동 천주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전국 사제단의 주장’을 발표하였다. 9월11일 이 사제들 모임은 서울 명동 성당에서 열린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모임’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서 그들은 지주교와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지주교가 감옥에서 보낸 글도 이 기도 모임에서 읽혀졌다. 앞에서 언급 했던 데로 유신체제를 고발하는 지주교의 ‘양심선언’과 가난한 이와 압박받는 자들과의 연대를 공언하는 ‘옥중메시지’는 가톨릭이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데 있어 구심점이 되었다.
  이 사제들의 단체는 아직 공식 명칭을 갖고 있지 않았다. 9월23일 이 모임은 원주에서 열린 전국 성직자 세미나에서 약 300명의 사제들이 더 가입하게 되어 규모가 증대되었다. 그날, 사제들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명칭 하에 그들의 단체를 공식적으로 조직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그들의 노력과 투쟁을 한데 모으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다음날 약 1,500명이 원주교구에서 기도 모임을 열었고, 기도 모임 후에 약 1,000명이 가두시위를 감행하였다. 9월26일 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기도모임을 열었는데 대략 2,000명의 사제와 신자들이 참석하였고 사제단의 이름으로 제1시국선언을 냈고, 약 2,000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의 시위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그 시위는 약 20명의 외국인 사제들을 포함한, 사제들이 참여한 최초의 가두데모였다. 그리고 둘째로, 그것은 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정치적 반대운동(political opposition movement)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교회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사제단이 주도하는 가운데 1974년 동안 최소한 54개의 기도모임이 열렸다. 때때로 사제단은 민주화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교회의 중앙 집중적인 전국 조직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예를 들자면 11월11일과 20일에 점점 더 많은 호응을 받게 되었던 기도 모임을 전국의 대도시들에서 동시에 개최하였다. 이들 기도회는 종종 가두시위로 이어졌고 곧 경찰관의 접전이 뒤따랐다. 서울 명동 성당에서는 수 천 명이 참여했던 이러한 특별한 기도 모임들이 평균 한 주에 한 번 이상 열렸다. 이와 같은 기도 모임 중에, 정의 구현 사제단은 다음을 포함한 중요한 성명서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 제1 시국선언 1974년 9월26일  (2) 제2시국선언 1974년 11월6일  (3) 정의실천 선언 1974년 11월20일  (4) 13개 본당과의 기도 모임과 5개 조항 결의문 채택 1974년 12월10일  (5) 2,000명이 참가한 명동성당에서의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모임 1975년 1월9일  (6)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모임 및 제3 시국선언 1975년 2월6일 기타 등등 이들은 사제단의 전국적인 활동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제단의 성명서들은 사제단의 진보적인(그 당시 기준에서 보면 급진적인) 성격을 드러내 주었고 이것 때문에 사제단은 다른 반대 운동들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사제단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함세웅 신부는 나중에 전국 규모의 재야 조직인 ‘민주 회복국민회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사제단은 1980년대를 통해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교회가 개입하도록 지속적인 동인을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사제단의 활동은 교회 내에서 교회의 정치 개입과 관련된 상당한 논쟁 및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지주교 사건은 사제단의 결성을 촉진 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각성시켰다. 한 좋은 예가 1974년 10월9일 서울가톨릭대학(신학부)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였다. 사제들, 수녀들, 5명의 주교들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올라 온 약 2만5천명의 신자들이 이 모임에 참가하였다고, 전주 교구의 김재덕 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회교리에 기초하여 신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에 관한 강론을 하였다. 대회의 끝 부분에는 사제단의 주도하에 사제들과 수녀들을 포함한 약 5,000명의 참가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플래카드와 피켓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1) 지주교를 석방하라  (2) 헌정질서 회복하라  (3) 민심은 천심이다  (4) 민중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었다.
  경찰이 그들의 진행을 막자 그들은 연좌 노성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이 흩어진 후, 경찰이 강력한 최루탄으로 방해하는 데도 불구하고 1,000명이 다시 모여 또 다른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 연좌 농성에 5명의 주교들(김재덕, 황민성, 나길모, 두봉, 박토마 주교)이 참가한 사실은 주목할 만 했고 그들은 신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것이 최초로 주교들이 정치적인 시위에 가담한 사건이었다. 이 운동은 사제들이 12개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인권회복 기도 모임을 열었던 11월11일에 절정에 달하였다. 이들 집회는 대부분 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지주교를 위한 이상의 노력들의 결과로 마침내 지주교는 1975년 2월15일에 석방되었다. 지주교 사건은 또한 신, 구교 지도자들이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의 공동노력으로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와 같은 공동 작업으로 앞에서 말한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1974년 12월25일에 결성되었다. 또한, ‘크리스챤 사회행동 협의체’(그 후 한국 교회사회 선교협의회로 개칭)가 다른 12개 교회 단체들과 함께 9월22일 명동 성당에서 모여 1,000명이 참가한 ‘수감자를 위한 합동 기도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표명하였다.
  1. 유신헌법 폐지하고 민주헌법 채택할 것.
  2. 긴급조치의 비효율성을 인정할 것.
  3. 언론, 집회, 결사와 출판의 자유를 보장할 것.
  4. 노동 3권의 보장과 교회 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위원회를 설립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공동 노력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운동에서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긴밀한 교류 관계를 예시하여 주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제단, 한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교회 내 다른 단체들이 비판적인 반대 성명들을 냈다. 김추기경 역시 비판적인 강론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또한 해외로부터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일본 정의평화위원회는 세계 각국의 교회들 앞으로 호소문을 냈다. 교황청은 7월6일과 13일 바티칸 방송을 통하여 지주교 사건을 경악스럽고도 슬픈 사건으로 소개하였다.
  요약하자면 지주교 사건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행동 주체가 된 정의구현 사제단의 창단을 가능케 하였다. 이 사건과 사제단의 결성으로 교회-국가 갈등이 훨씬 더 심화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전체 교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유신체제의 정치적 탄압에 반응하였는가를 예시하여 준다. 이 사건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과 관련도어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정치 쟁점화 하였다. 이것은 또한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안에서 종교와 정치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지주교 사건은 또한 교회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특징짓고 제한시키는 규범적, 구조적 그리고 행태적 요소들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규범적 요소는 가혹한 탄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폐해를 공격하는 데 있어 사제단을 통하여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교회의 의지와 능력이었다. 유신체제를 탄핵하는 지주교의 7월23일의 양심선언과 뒤이어 가난한 이들과 압박 받는 이들과의 연대를 공언하는 ‘옥중메시지’는 억압적인 박정권에 대한 용기 있는 저항일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해방신학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예언자적 입장 표명이었다. 스미스가 칠레의 경우와 관련하여 언급한 것처럼, 교회는 교회의 일부(한국의 경우는 지주교)가 국가의 탄압에 희생이 된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기도모임과 시위를 하고 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예언자적 성명서와 선언물을 발표함으로써 대항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들 메시지들은 지주교의 석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를 고발하고, 특정한 정치적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10월9일 전국 성년대회와 뒤이은 시위는 바티칸 공의회와 해방신학, 특히 ‘하느님의 백성’ 개념을 강조하였다.
  교회로 하여금 국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예언자적 역할의 수행을 가능케 하였던 중요한 행태적 요소는 대중 자신들이 교회를 다른 단체에 비해 도덕적 권위가 있고 신뢰성과 진실성이 있다고 본 점이었다. 대중들의 이런 시각은 압제적인 국가가 교회에 부과했을지 모르는 강제력을 제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국가의 억압적인 경향은 교회를 지지하는 대중의 여론과 감정의 힘 때문에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규범적 요소에는 교회가 ‘정치에 간섭’한다고 공격하면서 독단적인 국가 안보와 반공주의에 근거하여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을 행사했던 박정권이 있었다. 교회는 종교적 자유와 교회의
지존권(self-preservation)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공격들과 격돌하였다. 또 다른 중요한 규범벅 요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는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들이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보인 단합된 노력이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관심에서는 다양성과 분열이 압도적이었을 상황을 다른 경우들과는 달리, 특정한 경우 사회정치적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교회들이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구조적 요소는 사제단의 창단 및 젊고 지보적인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넓고 진보적이며, 때로는 급진적인 관심을 갖고 기도 집회, 시위 및 다른 여러 활동에 참석하면서 보여 온 공동체의 형성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이 많은 주교들의 제재에 의해 제약을 받았는데, 주교회의는 지주교 사건과 관련하여 사제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고 반대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대안으로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애매하고, 조심성 있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개별적으로 몇몇 주교들은 기도 모임과 집회에 참석하고 집전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뒤 이은 시위에 최소한 한 차례는 참가하였다. 더군다나, 사제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운동들에도 개입함으로써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교회의 전 세계적인 조직도 역시 중요한 요소였는데 교황청은 이 사건에 대한 스스로 견해를 이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렸다. 끝으로 사제단이 사용한 기도 모임 및 평화적인 설득 방법이 국가의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방법들을 궁극적으로 이긴 셈이었다.


‘노동자들의 진정한 친구’

박순희 /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 회장

  항상 깔끔하신 인상과 강직하면서도 인자하신 옆집 아저씨처럼 인정이 많으시고 사랑을 말씀으로가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셨던 주교님은 우리 노동자의 눈앞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지주교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발언권을 세워주셨고, 농민과 노동자,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존귀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생산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역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또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인격적 대우를 할 때 만이 국가는 올바로 발전할 수 있다’며 “나는 왜 노동자를 외면하지 못하는가?”를 고백하시면서 머리로만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정리하게 하시고, 연일 터져 나오는 약자들의 사건에 동참하신 것은 노동자들에게 꿈과 희망이며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노동자들 속에 살아 계시는 복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주교님의 애절한 사랑이 담겨진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합니다.

  “오늘날 노동자의 문제는 민주, 민생, 민족, 통일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진 인간의 모습,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인간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권의 문제이며, 동시에 민권의 문제입니다.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 자신들이 깨어있는 힘으로 해결 되어질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대다수의 많은 국민들이 노동자들과 더불어 정신적으로 실천적으로 같이 있고 같이 활동할 것을 또한 믿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운명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민중은 민중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노동자의 문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내적 단결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1978년 11월 씨알의 소리)”

  18년 전에 주교님의 이런 말씀은 노동자 미래에 대한 예언이셨으며, 희생과 고난의 삶이셨습니다. 그러나 주교님 기뻐하십시오. 95년 1월12일 민주노총이 건설되었으며, 96년 2월28일 규모가 세워진 사무실로 이전하여 현판식을 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과 동지애로 사회개혁에도 앞장서 가고 있습니다. 70년대 노동귀족으로 군림했던 한국노총도 변화의 움직임이 생기겠지요.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주교님의 뜻 받들어 주교님의 기념사업회가 또 다른 장을 열어 가리라 믿습니다.
  제가 주교님을 처음 뵈 온 것은 72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총재 주교님이 되셨을 때 였습니다. J.O.C 모임은 각 본당에서 팀 모임으로 하는데 보통 노동자들의 퇴근 시간이 12시간 맞교대이므로 저녁 7시에 퇴근해서 성당에 오면 8시나 되어야 모이는데, 9시30분이 되면 성당 문을 닫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교회로부터 마련되지 못하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70년대 유신독재 정권하에서는 노동자들이 모이는 것 가체가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면 몇 달을 비밀로 모여서 정성을 들여 소모임을 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주교회의’에 가서 호소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주교님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들어 주시고 위로하시는 그 인자하심에 눈물로 호소하는 노동자들에게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주시면서 “힘을 내어라 예수님은 너희 편이시다”하시며 어려울 때 함께 나누면 된다고 달래시며, 주교님들 앞에서 사례를 이야기하라고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이런 것이 저에게는 부르심이 되어 지금까지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하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73년 신, 구교연합(한국노동교육협회) 조직에 회장직을 맡으신 주교님의 정의감은 한국노동운동에 막을 이어낸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셨으며 주교님의 가르침과 불의에 항거하는 실천적 사랑에 힘입어 어려운 탄압과 온갖 모함과 용공조작으로 붙여지는 빨갱이라는 핍박도 견딜 수 있었으며 극복 해 냈습니다. 80년 군부정권이 출범하면서 노동 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70년대 산별노조를 해체하고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의식된 노동자들을 강제로 해고시켰고,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 모진 고문으로 죽음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피골이 상접한 노동자들을 보면서 주교님이 통분하시며 아파하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마음을 울먹이게 합니다.
  제 자신이 80년 수배되어 여러 개월 되었을 때 중앙정보부에 연락하여 수배를 풀자시며 원주 교육관에서 지내게 하시고 챙겨주시던 어버이 같은 사랑, 노동자들이 나눔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걱정하시며 회갑 때 들어온 축의금을 손수 꽁꽁 싸주시던 극진함과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감옥에서 억울함을 단식으로 항의 할 때 찾아오셔서 격려하시며 용기를 주시고 올바르게 더 잘살려고 하는 것이니 먹을 것 먹고 싸우자 하시며 나도 감옥에 있을 때 단식을 했는데 단식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며 애써 마음 아픔을 감추시던 모습 등을 생각할 때 주교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것을 더욱 느끼곤 합니다.
  1년 감옥을 살고 나와 주교관에 갔을 때 기뻐하시면서 ‘귀한 사람들이니 맛있는 것 해줘야 된다’시며 주방에 특별한 부탁을 하시는 장상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식사 중에 갑자기 ‘아네스 미역국 끓일 줄 아느냐” 하시기에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제 주교님 미역국이나 끓여주고 노동운동 그마하라고 하시며 허탈한 웃음 속에 눈물이 그렁하시던 모습 속에서 성모님의 아픔을 보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는 듯 하였습니다.
  이런 기억들 모든 것이 지금 저는 지탱하게 하는 활력소인 것입니다. 권위나, 명망을 세우지 않으시고 있는 것 자체를 다 내놓으신 삶이셨기에 서슬이 시퍼런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숨 죽여 있을 때 새로운 노동운동의 의식과 단결의 장이 될 수 잇도록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아주시고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신음하며 원한 맺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힘을 실천으로 체득하게 하시며, 노동의 신성과 인간의 존엄성 지켜내는 것이 노동운동이요, 인간화 운동임을 각인 시키신 주교님,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연대하는 힘이 반드시 사회를 변화시키고 교회의 사회성을 축구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배와 해고된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에 의하여 취업을 못하고 거리를 방황할 때 해결방안을 못하고 거리를 방황할 때 해결방안을 고민하시며 또 다른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주교님, 해고되어 직장을 갖지 못하는 노동자 선배들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 해 주시고, 터전을 마련 해 주신 주교님. 병상에 계시면서도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의 운영을 걱정하시면서 방문하는 우리에게 “이제 내가 힘이 없다.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하시며 안타가워 하시던 주교님, 그 크신 사랑의 발자취를 따르겠습니다. 이 부활절에 주교님 삶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합니다. 베론의 통일 동산에서 기뻐하시며 편히 쉬세요. 주교님 만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 수 있도록 지도 해 주세요.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누리십시오.


“남을 위해 진실 되게 울어 본 사람”

박의근 / 본회 집행위원장

  “야가 우리 망내이 압니더. 차칸아 되라꼬 강복 좀 해주이소, 얼매나 장나이 심한지요. 마, 그래도 성당 일 이라카믄 십리도 띠갑디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새로 서품 받은 지학순 신부가 우리성당(부산 동래)에 왔을 때 어머님의 말씀이다. “서울래기 다마내기 마 쪼혼 고래고기 달달 보까서…”하며 매일 싸움만 하고 지내던 시절, 인상이 좋고 미소가 구수했던 지주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승학교 2학년 때 ‘교황님이 계시다는 로마에서 공부한 박사신부’를 동경하며 초장동 본당 신부인 지 신부를 찾아 갔었다. 초행길이라 성당을 잘못 찾아 왼편으로 꼬부라졌더니 왠 귀신 같은 여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대가이에 피돈 안마른기 요렁데오면 못쓰는기라” “XX야!”하고 야단이었다. 바로 그곳이 부산 완월동이라었더란다. 지주교 덕분에 일직부터 사창가와 인연이 생기게 되었다. 왠 인연이냐 하면, 원주 주교관에 지주교님을 뵈러 갈 때면 기차역에서 내려 주교관에 걸어가는데 그 길목이 바로 희망촌이라는 사창가였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완월동, 원주에서는 희망촌을 같은 동네에 두고 그렇게 오래 사신것이다. 후에야 그들이 주교님을 존경하게 됐지만 처음에는 야유와 무안도 수 없이 당하셨다. 여하튼 내가 62년 8월15일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거창한 식사 대접을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주방 아주머니가 금방 지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에 큰 그릇에 생선구이, 김, 국, 불고기, 나물, 명란젓, 북어찜, 잡채 등등...준비해서 상을 방에 놓고 나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 밖에 없는데 말이다. 내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한참을 있었더니 물을 가져온 아주머니께서 다 식는데 안 먹고 뭘하고 있느냐고 해 그때서야 내것일줄 알고 황공하게도 신나게 먹어치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 바쁜 행사가 있는 날, 나 같은 학생에게 인사나 반갑게 받고 돈가스 한 그릇 값을 줘도 ‘하느님!’ 할텐데(그때는 돈가스 한 그릇 먹어보는 것이 왕자 쯤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신부가 고등학생을 인격적으로 소위 대접을 했다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그 사건으로 나는 지주교님에 대한 평생의 존경과 사랑이 이미 결론 나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은 추운 겨울에도 주교관에 손님이 없을 때는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으셨다. 옷을 따뜻이 입고 정히 추우면 전기스토브 하나 피우면 되는 것을 혼자 있으면서 따듯하려고 집 전체를 데우는데 비싼 기름을 낭비할 수 없다는 통통 막힌 소리를 하셨다. 이유는 “어려운 교우들이 내는 돈으로 먹고 지내는 것만 해도 미안한데...”하면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신 것이다. 또 화장실용 휴지를 색깔 나는 것을 사온 날 -그것도 검은 것이 없어서- “아주 싼 시커먼 휴지를 쓰지 평신도도 아닌 수도자가 양심도 없어?”라며 당가수녀를 눈물이 쩔쩔 흐르도록 큰소리로 야단을 치시곤 했다. 헛바퀴 돌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그 분은 진실 되게 울어본 특별한 분’이었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정의를 위해 울었고, 만천하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로 방영된 TV에서도 울었다. 불상한 사람들, 이북동포들, 남한의 철없는 사람들, 가엾은 동생을 위해 기도하면서 참으려고 애를 썼으나 주교 체면에 그냥 울어버렸다. 그 눈물은 목숨을 걸고 발표하셨던 양심선언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었으며,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남을 위한 아픔으로 진실 되게 울어본 지도자가 얼마나 있는가? 허약한 육체의 가슴위로 탱크가 지나간 듯 모든 것이 박살나고 다 부서진 심리상태에서 허탈을 휘어잡고 “주여!”라고 부르며 안기부에서도 울었었다. 악명 높은 안기부에서 교회의 주요 성직자들의 구체적인 비리와 타락상을 확대하여 지주교에게 설명 해 주었더란다. 어떤 성직자들의 여자문제까지 거론하며-수 십장의 사진을 집어 던져놓고-교회가 이꼴인데 너 혼자 잘난척 하지말라 하더란다. 민주회복을 위해 현직 주교가 정부에 맞선다고 옥살이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그 때, 엉터리 군법회의에 의해 조작된 죄목으로 형을 받고 감당키 어려운 수모를 겪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교황청은 바티칸 방송으로 ‘경악스럽고 슬픈 사건’으로 발표하였고 지주교 자신은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 힘든 시련을 예언자의 사명으로 이겨내었던 것이다. 못 배워먹은 상것들도 도둑놈이나 사기꾼이 감옥에 있으면 죄는 미우나 사람은 동정하는 것이거늘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감옥에 있는 지주교를 비난하는 동료 성직자들이 있었음은 어떻게 해석하고 수긍해야 할런지 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주님과 진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또 “이제는 감옥에서 내보낸다 해도 이곳에 내가 있어야 교회의 쇄신과 일치, 그리고 민주회복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시기에 이르렀던 분이었다. 신학생 때 북한의 종교탄압 실태를 전하기 위해 1950년 1월에 월남한 청년 지학순은 34년만인 85년 9월 이산가족 방문단으로 평양에 가서 한국사제로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 중에 흐르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두고 울었던 그는 과연 무엇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지 깊이깊이 생각하고 또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방
구병진 신부 / 본회 회원, 마산교구

  천국의 문 앞에 천국 신입생이 도착하자 천국의 문지기 베드로가 그를 따듯이 맞아들여 천국 이곳저곳을 안내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방에 가까이 가니 그 천국 신입생의 귀에 천지가 진동하는 듯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서 베드로에게 물었다.
  “베드로님 여기가 무슨 방인데 이렇게 시끄럽습니까요?”
  베드로가 천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신입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무 시끄럽지요? 네, 여기가 보좌신부들 방이지요!”
  그리고는 그 다음 방을 가리키며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방은 본당신부들 방이랍니다.”
  천국 신입생이 그 방이 하도 조용하길래 베드로에게 물었다.
  “베드로님, 도대체 이 방은 왜 이렇게 쥐죽은 듯 조용합니까?”
  그랬더니 베드로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어휴! 그런 아직 그 방에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거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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