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1 18:07:41, Hit : 4086
 들빛회 소식지 제12호

  정의가 강물처럼
1998년 8월  발행 제12호

꼭 필요한 세상의 빛으로…
- 정의평화 운동을 -

  들빛회는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국내외 개인 및 단체를 포상하고, 국내는 물론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해외에서 받았던 도움에 보답하는 뜻으로 정의평화를 위해 애쓰는 해외의 개인 및 단체에 정신적, 물적 지원을 하기로 스스로 약속하며, ‘지학순주교기념사업회’에서 ‘들빛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2년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약속의 한 실천으로 들빛회는 ‘정의평화상’을 제정하여 97년 시상을 시작으로 2회에 걸쳐 시상한바 있습니다. 힘겨운 일이었으나 함께 해 주신 한분 한분의 의지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기에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천원, 이천원으로 모여진 소중한 후원금으로 시상되는 정의평화상은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밀알들에겐 힘과 용기가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현재 추진 중인 법인 설립 또한 들빛회 스스로의 재정자립을 통해 보다 굳건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함입니다. 회원님의 후원회비와 법인설립을 위해 정립된 기금의 수익금올 매년 정의평화상을 시상하며, 이 땅의 살아있는 양심의 빛을 밝혀주고자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궂은 역사와 실의의 아픔을 뚫고 새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을 달리하며 태어나지만 그 새 생명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모습은 그 누구라도 함께 꿈꿀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삶의 공동체, 하느님의 주신 세상을 향한 고귀한 선물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은 우리 삶속에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배운바 있습니다. 끝없는 갈등과 타협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지켜지는 정의, 이러한 힘겨운 과정 속에서 지켜지는 정의는 남의 것이 아닌 나와 너, 모든 이들이 평화로 다가오리가 믿으며 들빛회는 모든 회원님들과 함께 더욱 정진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넉넉한 세상을 만듭니다.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고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은
더불어 삶을 나눌 때만
세상을 보다 넉넉하고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통해
지난 역사의 시련과 극복과정을 통해
서로 섬기로 함께 나누는 공동체만이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길과 힘이 됩니다.
아직, 우리 곁에는
굶주린 이웃, 빼앗긴 이웃,
하느님의 정의에 목말라하는
아픈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삶을 나눌 때
밝고 건강한 사회를
따스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 지학순 주교 5주기 추모미사 및 제2회 정의평화상 시상식

  3월9일 가톨릭회관 7층에서 추모미사와 시상식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250명 가량의 참석자와 함께 2회 시상식 수상자로 선정된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의 수상을 축하하였습니다. 시상식에 1회 수상자인 민주노총 전 권영길 위원장 및 고찬근 지도신부님과 진료소 소장님, 라파엘 의료진들께서 함께 하셔서 본회 시상식을 빛내주셨습니다. 상패와 시상금으로 1천만원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사회 소식
  본회 이사회에 현재 네 분의 이사님께서 새롭게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지난 6월24일의 이사회에서 이귀철 선생님, 전종훈 신부님, 박창일 신부님, 신대진 사장님께서 신임 이사님으로 추대되셨습니다. 바쁘신 가운데에 함께 해 주신 신임 이사님과 함께 법인설립을 힘차게 준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함께 해 주신 이사님께 감사드리며 이를 계기로 보다 발전하는 들빛회를 기대합니다.

  법인설립을 위한 300인모임 현재까지 이어져 사단법인으로 결실을
  법인설립을 위한 300인 모임을 위한 2차 간담회가 지난 2월5일 가톨릭회관에서 약 150여 분이 참석하신 가운데 열렸습니다. 본회 고문이신 윤공희 대주교님(광주대교구장)께서 함께 하셔서 법인설립을 준비하는 본회의 움직임에 힘찬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2월5일 간담회 이후 현재까지 모금된 기금을 바탕으로 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승훈(본회 회장, 시흥본당 주임신부
  5월18일 -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있었던 조성만 형제 10주기 추모미사에서 주례
  6월15일 - 부산에서 열린 하 안토니오 신부 서품40주년 기념미사에 참석, 공동집전
  6월18일 - 12시 청와대에서 김대통령의 초청으로 열린 종교지도자 오찬간담회에 참석, 환담
  6월30일 - 여의도 맨하탄호텔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정균환사무총장, 설훈의원, 한기찬인권위원장등을 만나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교회의 입장을 전달

  문규현(본회 부회장, 서학동본당 주임신부)
  지난 6월1일 문규현 신부님께서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에서 통일상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민족통일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애쓰시라고 드리는 상이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최기식(본회 상임부회장, 원주교구사회복지회장)
  본회 상임부회장으로 계시면서 원주교구 사회복지사업 후원회장님으로 활동하시고 계십니다. 웑사회복지사업후원회에서 오는 8월27일 매년 개최하는 옥수수잔치가 있습니다. 후원회원들뿐 아니라 함께 하시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합니다.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서울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박재일 (본회이사, 사) 한 살림회장)
  지난 5월28일 신협 협동조합 중아회 강당에서 열린 환경농업단체연합회 사단법인 전환 총회에서 박재일 이사님께서 회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신임 회장님을 주축으로 환경농업을하는 생산자 단체와 도시에서 호나경농산물 먹기 운동을 하는 단체간 큰 발전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환경노어업단체연합회에는 정농회, 유기농협회, 민우회, 한 살림, 가톨릭농민회,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흙살림연구소, 자연농협회, 생활협동조합중아회, 신협협동조합중앙회 등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최재선(본회이사, 사회복지위원회 사무국장)
  5월21일~6월1일까지 파키스탄에서 개최된 아시아 인간발전 협력체(Asia Parthership for Human Development) 이사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아시아 각국 까리따스 및 유럽, 북미, 호주, 뉴질랜드 대표(23개국) 참석, 아시아 각국 원조사업 미화 4,300,000불 배정.
  최근 그리스도교 신자 탄압에 항거하여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신 존 죠셉 주교님에 관한 사건경위 청취 및 자료입수.
  6월24일 학교법인 서강대학 재단 이사회 참석 정한채 신부, 새 이사장으로 선임
  6월24일 ‘종교계 사횝고지협의회’ 천주교측 실무위원으로 보건복지부 장관과 간담회.
  IMF 체제하의 종교계 역할에 대한 논의

  박의근(본회이사, 보나에스 대표이사)
  박의근 본회 이사는 지난4월8일(재)국제농업개발운 이사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본회 회원이신 김상욱(전국소방인연합회 회장)회원께서는 국제농업개발원 자문위원으로 고용규(s.u 사장) 권수천(성우무역 사장)께서는 운영위원으로 추대되셨습니다. (재)국제농업개발월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라파엘의 좋은 이웃되기
김전(라파엘클리닉 소장, 서울대학병원 생리학교실 교수
  소박한 정신으로 소외된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따듯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는 진정한 의료인들의 무료진료소, 라파엘크리닉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라파엘 크리닉은 올해 본회의 제2의 정의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정리 들빛회 간사 -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어떤 계기로 무료진료를 하게 되었나요?
  저희 총무님이신 안규리 선생님께서 천주교인권위 김형태 변호사님을 잘 알고 게신데 그분을 통해서 외국인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죠. 그런데 적십자에서 혜화동 성당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진료한다고 해서 가서 본적이 있어요. 그런데 의사 서너 분, 간호사 몇 분, 약품 조금 이렇게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우이가 진료를 하겠다고 했더니 적십자에서 그럼 재정을 일부 지원하겠다고 했죠. 지금은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강당 복도에서 진료를 하고 있어요. 약방과 일부진교기구는 그곳에 설치하고 진료하고 있습니다.
  - 들빛회의 정의평화상 수상 후 시상금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 시상금은 구호소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구호소에서는 모든 재정관리를하고 있지요. 약품에 드는 비용이 많지만,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진료외적으로 필요한(쌀 등) 물품을 드리고 있지요.
  - 진료 받는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건가요?
  - 방문하는 노동자들에게 격주로 쌀 2.5kg 1~2봉투씩 주고 있어요. 대략 미아리 외국인노동자 쉼터, 김포공동체, 혜화 필리핀 공동체, 금촌 페루 공동체, 수원아프리카 공동체, 안산시 노동복지회관 등에 쌀을 보내주고 있어요. 외에도 새로 준비중인 곳이 4군데 정도 되구요. 그래서 들빛회에서 고맙게 받은 시상금은 구호소에서 적절히 계획해서 사용하게 될거예요. 큰 도움이 되었지요. 아주 감사해요.
  - 보통 한번 진료하는데 몇 분이나 오시나요?
  - 150~200명 정도, 대부분 1차 진료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진료하는데 큰 문제는 없어요. 가끔 CT 촬영이 필요한 경우나, 추출한 샘플(소변검사, 혈액검사 등)은 들고 뛰죠. 앞으로는 진료과목이 더 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IMF체제 이후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 어차피 어려운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실업이라고 해야 되나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일한 돈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죠! 그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 거의 다 본국에 송금해요. 그리고 최소한의 것만으로 생활하죠.
  - 진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감동적인 기억)
  - 욕심을 부리지 않는 부분이 마음에 남아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에서 식료품과 옷가지를 무료로 준다고 했을 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가고 필요 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더라구요.
  -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기억은요?
  - 그래도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거의 인간적인 모멸감을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어요. 지금 1년치 월급을ㄹ 몽땅 사업주에게 빼앗긴 사람도 있고, 우리 사업주들이 그네들에게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부끄러웠지요. 그리고 한국에 오자마자 영세한 사업장에서 손가락  네 마디를 다 잘린 사람도 있었는데 사업주가 신경을 안 쓴다고 하더군요. 무척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죠.
  - 현재 진료에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고 있나요?
  - 지난번에 들빛회에서 큰 상을 받는 것이 제일 크구요. 서초동 성당 직장인 청년 분들과 후원인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적십자에서 매달 지원해 주고 있구요.
  - 약값도 크겠지만 장비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 여기저기서 모으고 병원에서 버린 것들 주워 모아 고쳐서 사용하고, 초음파는 신부님R-p서 기증해 주시고. 그렇게 조달해서 사용해요.
  - 라파엘의 경우 진료활동에 대한 홍보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관심도 많이 불러일으켰던 같구요. 특별한 홍보를 하나요?
  - 특별히 홍보 계획을 하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제 생각은 그래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하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일 수 있고 그러다보면 목표치에 못가면 힘들고 어려지고 그렇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하고 또 준비가 더 잘되면 거기서 한발 더 나가고 그렇게 하는거죠. 그래서 크게 홍보하거나 그러지 않고 후원인들과 진교 선생님들의 자연스런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지기도하고 또 지도신부님이 만나는 사람들 붙잡고 얘기하세요. 걸어 다니는 스피커시죠.
  -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 그 부분이 저로서도 상당히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들은 본국에서 선생님을 한다던가 공부도 할 만큼 한 사람들인데 한국에서는 온갖 인간적인 모멸감과 멸시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분들이 돌아가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실지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그래서 진료를하 고 있지만 그분들과 인간적인 관계로 다가갔으면 하는 생각이 큽니다.
  - 반복된 진료를 하면서 초기의 긴장감과 의지를 간혹 잊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료진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지요?
  - 병원에 와서 진료하는 사람들 의사 분들과 얘기도 잘 못하고 찡그리고 한참을 기다리고 그러죠? 그런데 그 선생님들 이곳에 와서는 힘 드시면서도 다들 웃고 계세요. 진료하시면서...보람을 느끼시는 거죠. 아시겠죠?
  - 라팔엘의 앞으로의 활동 목표와 계획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 현재 격주 진료를 하고 있는데 매주 진료를 하려고 해요. 한주는 진료를 하고 한주는 의식주 등 식료품을 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저희들이 가진 만큼 더 욕심 부리지 않고 그분들이 한국에 있는 한 계속적으로 일을 하려고 해요. 궁극적으로 진료하는 일이 없어져야 하겠지만 말이예요.
  

지원사업

  지난 4월5일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김승훈신부님(본회 회장)께서 본회를 대표하여 인권운동가 서준식 선생님께 ‘모든 국민의 인권을 위한 활동에 소중히 사용해 달라’는 본회의 뜻과 함께 50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서준식 선생님은 현재 인권운동사랑방의 대표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에 회원들게 서준식 선생님의 자세한 활동 내역과 약력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인권운동 이전 - 분단의 수인(囚人) 서준식
  그는 194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입니다. 징병이 아니면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다수인 재일 한국인들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민족적 차별이 서준식의 유년기를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준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시사한 ‘반(半)쪽발이가’ 되지 말고 당당한 조선놈이 되라고 가르친 어머니 덕분에 서준식은 차츰 민족과 조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그의 마음은 모국유학의 꿈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이미 ‘후꾸다’라는 일본식 성을 버린 조국의 아들이었습니다.
  사회안전법으로 고역을 치르기도 한 서준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반 사회안전법 투쟁은 “인간의 내심은 법적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대외로부터 출발한다고, 그리고 또 “사회안전법 앞에 알몸으로 서 본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흡사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 앞에 알몸으로 선 인간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88년 5월, 서준식은 보호감호처분위원회의 보안처분 조류변경(주거제한)에 따라 17년 1개월만에 석방되어 바깥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사회안전법으로 묶인 수인 가운에 처음으로 전향각서를 쓰지 않고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은 채 두 발로 감옥문을 나선 사람이 되습니다. 그의 석방은 그 자체로 반인류적 범죄자들에게는 두려움이겠지만 이 땅의 인권운동의 입장에선ㄴ 하나의 강항 버팀목을 얻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는 당연하게도 출소한 후 잊혀진 수인-‘장기수’-를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는 이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라는 단체에서 인권위원장을 맡아 인권운동의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분주히 움직이다가 91년 5월을 맞습니다. 상기하자면 91년 5월은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이란 것이 발생했던 때였고, 전민련 인권위원회에서 서준식과 활동했던 김기설이라는 청년운동가가 그해 5월8일 유서를 써놓고 분신 자결을 하자, 보수언론들은 분신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이 잇다고 떠들기 시작했고, 강기훈을 당시 전민련의 김씨의 유서를 대필한 범인으로 지목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인권운동가로 서다
  서준식은 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자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자료를 찾아서 분석하고 검찰의 논리를 반박하는 허위와의 싸움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서 함께 농성하며 유서대필 사건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해 나가던 그는 강기훈 씨와 함께 구속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가 본격적인 인권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서 서준식은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유서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지속적인 홍보사업과 재심 청구사업 등을 진행하였고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언론보도자료 등을 묶어 총 3권의 책에 담은 그 작업은 한국 인권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라고 평합니다.
  한 사건을 집요하게 붙들고 법적인 판단마저 내려져 역사적인 평가를 기다리는 그 사건에 대해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자료로 망라한 적은 적어도 우리 인권운동사에서는 없었다고 합니다. 한편 91년의 수감생활 중에 서준식은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답답한 현실에 대해 타개할 방향을 고민하였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전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가 세운 목표는 ‘인권운동의 전문화, 대중화, 국제화’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인권운동에 뜻을 둔 젊은 활동가들을 모아 인권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조차도 ‘세계인권선언’도 읽어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어 92년 한국인권운동을 전문화시킴으로써 열악한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그는 ‘인권전문센터’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93년 3월 ‘인권운동 사랑의’의 창립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인권영화제와 세 번째 구속, 그리고 석방
  인권운동의 전문화, 대중화, 국제화라는 목표로 창립된 ‘인권사랑방’의 대표로서 서준식은 세계 최초의 인권전문 팩스신문이라 할 수 있는 ‘인권하루소식’을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사건을 추적하고 홍보하여 왔습니다. 또한, 전문적인 인권운동을 위해 정보와 자료의 축적, 분석을 통해 과학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보자료실을 개설합니다. 이 정보자료실은 현재 1만여 건의 인권자료를 축적한 국내 최초의 민간단체 자료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97년 7월부터는 컴퓨터 통신에 자료목록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인권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아래 초기부터 인권교육을 위해 교재 개발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대학생과 고교생 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인권교육을 시행하고 강연활동을 통해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아울러 서준식은 국제연대 사업을 인권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상정하였습니다. 인권문제 자체가 보편적인 성격과 아울러 국제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고, 연대를 통한 인권 문제의 개선과 인권옹호활동은 매우 기본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의 인권운동은 매우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고 이를 타개하는 계기는 정부가 90년 유엔에 가입하고 그와 함께 ‘국제인권조약’에 가입하면서부터 주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는 93년 ‘유엔세계인권대회’에 민간단체들이 공대위를 구성해 참가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인권운동사랑방’은 이 대회에 대표와 실무진을 파견함으로써 국제연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후 서준식과 ‘인권운동사랑방’은 동티모르 관계자들을 매년 초청하여 국내에서 동티모르 문제를 알려내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러한 노력은 동티모르 연대모임으로 결실을 보기도 했습니다.

  인권운동 사랑방과 제1회 인권영화제
  그 밖에도 인권운동 활동가들의 해외연수와 국제연대 훈련, 엠네스티 등의 국제인권단체들과의 교류, 유엔인권위원회에 대한 모니터 국제인권조약 민간단체 보고서 작성 등에 참가하면서 인권침해의 현실에 대한 충실한 감시자의 역할을 지속해 왔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의 중심에 서 있던 서준식은 96년부터 ‘인권영화제’를 기획하여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를 개최하게 됩니다. 인권영화제는 영화라는 대중적인 매체를 활용한 인권교육의 한 방안으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에 찌든 우리 영화계와 대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은 영화들을 상영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의 현실을 고발하고 인권옹호를 위한 노력들을 소개하여 인권에 대해 우리 사회가 스스로 성찰 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단순하지도 순탄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검열이 엄존하고, 국가보안법 등으로 표현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한계 지워진 우리의 현실은 인권영화제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인권영화제’는 인권의 이름으로 인간존엄성의 가치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사전검열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불법영화제’라는 모함을 무릅쓰고 힘든 길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사전검열이 부당한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에 수동적으로 대응해 오던 기존의 영화계나 영화제에는 공개적으로 검열을 거부하면서 치러 낸 ‘제1회 인권영화제’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1회 인권영화제’의 경우는 행사 장소였던 이화여대 측의 묵인으로 별무리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영화제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가회 폭발적이었습니다. 서울에서만 1만5천여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갔고, 지방 14곳에서 1만5천명의 관객들이 영화제를 관람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난...그에게 씌어진 죄목은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 위반, 보안관찰법 위반 등이었습니다.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자신의 사건에 대해서 변호인들을 통해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과, 국가보안법 제7조,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의 위헌성을 들어 위헌심판제정 신청을 청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싸운 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에 갇혀 있는 미결수의 처우문제에 대해 세 가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습니다. 즉, 미결수에게 죄수복을 입히는 것, 신문기사를 가위로 오려내는 것, 검찰조사 대기과정에서 수갑을 채우는 것 등, 사소한 것 같지만 인간성에 가해지는 불합리한 행위에 대해 그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98년 1월30일 첫 재판을 거쳐서 2월5일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감옥생활에서 벗어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어떤 사람은 이런 한탄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몇 번의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제 오십의 나이를 훌쩍 넘긴 서준식, 그는 고난을 즐기는 사람도, 고난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누구에게라도 예외없이 가해질 수 있는 불의의 횡포로 인한 고난이 존재하는 한 온몸으로 고난에 맞설 것입니다. 불의의 한계는 그것을 한계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한계가 됩니다. 그는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보내는 변치 않을 믿은 하나는 자신의 고난에 찬 삶이 체득한 불의의 한계에 저항하는 일관된 정신을 그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준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기에 충분합니다. “인권운동가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에 수 없이 절망하지만 또한 이 말에 매달린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신의 실체를 요약한 말일지 모릅니다. 새삼 확인하건데 우리는 그에 대해 너무나 큰 빛을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을 청합니다!
- 파키스탄 존 죠셉 주교님 -


  파키스탄에서는 현재 소수 종파에 대한 탄압으로 적용하고 있는 ‘독성법’으로 인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파키스탄의 존 조셉 주교님은 독성법의 편견적 요서에 항의하는 다각적으로 비폭력적인 활동을 벌이셨고 끝내 지난 5월6일 저녁 독성죄를 적용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자신의 교구 신자인 아웁마쉬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히왈 법정에가서 자신을 권총으로 쏘아 죽으심으로서 독선적인 법에 희생되는 많은 소수종파를 대신 해 항의하였습니다. 극단주의자와 편견적 요소에 의한 독성법의 악용으로 소수민 사회가 겪는 좌절을 생을 마감함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 독성법 : 거룩한 코란, 이슬람의 예언자. 그의 부인들과 기타 이슬람의 성자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목적, 비난, 풍자, 비꼼 등에 의해 간접, 직접적으로 이슬람의 성자들에 대해 모욕하는 자는 3년의 구금에 처하게되며, 거룩한 코란을 모욕하면 무기징역, 거룩한 예언자를 모욕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 그러나 실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과 교회가 약탈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함.

  존 죠셉 주교님은 ‘독성법’의 사형선고 규정에 반대하여 2차례의 전국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단식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첫 번째 항의는 92년 정부가 전 국민의 신분증 카드에 가진 종교를 명시하는 항목을 포함하겠다는 제안이 나온 것으로부터였습니다. 이 새로운 신분증 제도가 앞으로 파키스탄에서 소수 종교인들을 더욱 더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1994년 4얼5일 법원 청문회가 끝난 후 법원 바깥에서 ‘독성죄
‘로 재판을 받던 그리스도인, 만주 마쉬가 살해되었을 때 전국적인 항의를 이끌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파키스탄의 인권운동에서 비폭력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안에서 큰 힘을 불러 모으셨건 가장 훌륭한 분이셨던 주교님은 그렇게 가슴 아픈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알려내고자 하셨습니다. 주교님을 잃고 실의와 개탄에 빠진 파키스탄의 모든 분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존 죠셉 주교님은 파키스탄 주교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시고, 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의장이었고 올해 4월까지 종교간 대화위원회를 이끌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의 희생자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에 정열적으로 헌신한 분으로서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는데 관심이 있는 모든 종교인들과 선의를 가진 사람들과 손잡고 늘 적극적인 비폭력 활동을 전개하신 분이십니다.” 파키스탄시 노드교부 성명서 -존죠셉 주교의 죽음에 부쳐 중


故 이영섭님을 추모하면서

부활을 꿈꾸며

떠나야겠다.

살 부비며 정 들였던 인연들은
허물 벗듯 던져버리고
남모르게 떠나야겠다.

밤 새워 날을 세워도
무디기만 한 칼 하나 품고
가쁘게 살아온 마흔 아홉 해

뚜렷한 느낌이라도 남았으면
뼈 속에 새겨 놓으련만……
애달파라
제 목숨 한번
힘껏 부둥켜안지 못 하였구나

떠돌 듯 쫓기며
쫓기듯 떠돌며
울리지 않는
천동소리를 기다리는 너


  故 이영섭회장은 : 1943년 서울출생, 1962년 경기고 졸업, 1962년 서울대학 문리대 국문학과 입학 “청동시대”로 서울대 총장 배 시 부문 입선, 1979년 (주)교하산업 창설
  1993년 한국민족예술인 총 연합 강사 취임, 1994년 선종하시기까지 지학순주교기념사업회, 들빛회 이사로 활동하심.
  故 이영섭(본회이사, 아현동성당 총회장)님은 천주교 사회운동의 발전에 함께 해 오신 하느님의 진정한 정의평화의 일꾼이셨습니다. 지난 97년 폐암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시기까지 정의평화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생을 사셨습니다. 이사님께서 생전 틈틈이 쓰셨던 시 중 한편을 소개하며 모든 회원님과 함께 추모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故 이영섭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인권문제, 예방이 중요하다
  오창익(루가,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제가 일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매월 평균 200명 정도가 자신의 딱한 사정을 갖고 찾아옵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저희 위원회 변호사님의 해 시는 월요인권상담을 통해 만나는 분들도 150명이 넘습니다. 주택임대차 문제든, 채권, 채무문제나 이혼 등의 가정문제든 간에 많은 분들이 자신을 인권피해자라고 하시면서 지원을 요청합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인권피해자이긴 하지만 저는 그 많은 분을 뵈면서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동생이 시국사건에 연류되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다음 저희 사무실에 찾아온 어떤 수녀님이 있었습니다. 이미 출가를 결심한 수도자였지만 혈육이 시뻘건 색깔이 덧칠해진 채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니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몇 가지 간단히 도울 일을 찾아 거들어 드렸습니다. 갑자기 심술궂은 생각이 들어서 수녀님께서는 평소 국가보안법처럼 정권이 자의적으로 엄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악법을 없애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아무것도 하신 게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 수도자마저도 자기 동생이 구속되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비단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에 의한 인권침해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너, 나가 따로 없습니다. 일선에서 일하는 인권운동가의 눈으로 볼 때 적어도 한국의 인권현실에서는 국민대다수가 인권피해자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인권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이 인권피해자로서 일상적인 인권침해를 당하고 산다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이 절반입니다 여성을 비롯해 전 국민의 2할 정도 되는 장애인, 노인, 어린이, 청소년, 실직자 무주택자, 농, 어촌에 거주하는 사람 등, 꼽아 보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다보면 상대적으로 인권침해를 덜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자신이 처한 조건이 사회적으로 인권침해를 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상대적으로 인권침해를 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남성으로 최소한 대졸이상의 학력(요즘은 대졸이라고 해도 다 같지는 않습니다)으로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고, 되도록 175cm 이상의 키에 준수한 용모를 갖춰야 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일정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
  물론 이런 사람이라 해서 인권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닥친 뜻하지 않는 사고를 통해 장애인이라도 된다면 또는 여러 가지 민, 형사 사건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인권문제로부터 상당히 자유롭다는 것도 그뿐입니다. 사람들은 당하고 나면 상당히 용감해지고 자기가 당한 피해에 대해 상당한 전문가가 됩니다.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어렵고 복잡한 어휘가 입에서 술술 풀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아 참으로 고생 많이 했구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서글프다는 생각도 감출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당하고 나서, 마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자기가 당한 인권침해에 대한 자기 구제에 열심입니다. 의학에도 예방의학이라는 게 있답니다. 병을 미리 진단하고, 큰 병이 찾아오는 것을 막자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전체로나 훨씬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명동성당에 와서 데모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도 막상, 자기가 근무하는 은행이 퇴출을 당하거나, 언론고시에 합격해서 의사, 판, 검사 부럽지 않게 살았던 기자라도 정리해고의 태풍이라도 맞게 되면 어김없이 명동성당 언덕을 찾습니다. 오늘도 수천명이 명동에서 노숙을 하며, 자기 문제를 해결 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금융위기로 시작된 국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사회의 곳곳이 너무도 썩어 있었음을 봅니다. 약자의 발언권은 봉쇄당하고, 언론은 권력, 자본과 결탁해서 거짓 설교만 늘어놓고, 공무원이든 기업인이든 모두 제 살 궁리만하고 있음을 봅니다. 조금 어려워진 상황, 하기에 따라서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권을 위한, 우리 모두의 인권을 위한 예방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전통을 만들어 가는 나라
지선희 / 본회 회원

  일본에서 사는 짧은 기간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가지가 잇다. 그 중에서도 마쯔리라고 하는 일본식 축제가 그것이다. 각 마을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축제인데 큰 가마 같은 것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가마를 메고 골목골목을 달리면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마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의 규칙과 그 외에 축제기간 동안의 할 행사를 의논하고 배우고, 연습하기 위해서 남녀노소가 몇 개월 동안을 매일 모여서 지낸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별것 아닌 것 같은 것을 위해서 어린이, 젊은이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배우고 참가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만약 그런 전통적 놀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공부 또는 일을 핑계로 무시하고 비협조적으로 젊은이들이 무관심으로 대하지 않을까?
  일본에 가서 놀란 점은 이와 같이 일본이 자기들의 전통을 굉장히 열성적으로 보전하고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수백년 전통적 의식과 행사가 아직도 생생히 전해지고 매년 되풀이되고 있고, 또한 젊은이들이 열심히 참가하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일본의 축제들은 우리나라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 그 큰 가마를 옮기면서 다 함께 외치는 소리가 바로 “왔쇼”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 계속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전통은 과연 충분히 남아있고 계승되고 있는가? 일본의 스모와 마쯔리, 사미선과 가부끼가 누리는 대중적인 인기를 과연 한국의 판소리와 씨름과 가야금이 누리고 있는가?
  우리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그런 고유한 뿌리를 지금이라도 찾아서 개발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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