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1 17:46:21, Hit : 3926
 들빛회 소식지 창간호입니다



                     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 회보 창간호 1994년 7월
                             발행인 : 이돈명   편집인 : 박의근


    지주교님을 추모하며
                                                김지하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 꽃피는 시절
그이는 몸져 누웠다.

꽃지고 여름도 지나
열매 맺는 가을이 오자
그이는 떠났다.

나무의 나이테는 그이의 나이
열매 속 새 씨앗은
그이의 넋

다시금 겨울이 오고
눈보라도 치리라

씨앗은 땅속에서 견인하는
그때
그이는 다시 추억으로 오리라

추억은 말씀이 되어 땅거죽을 뜷고
힘차게 봄을 불러
마침내는 해마다 거듭되는
끝없는 노고지리의 노래가 되리라.  


창간사

사회참여 신앙의 꺼지지 않는 횃불로
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  회장  이돈명


  가톨릭은 보편적이란 뜻을 지리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보편 교회이사. 특히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 자체가 바로 교회라는 개념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당연히 사회의 한복판에 참여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1970년대 초 한국가톨릭 교회의 사회참여를 앞장서서 행동으로 구현한 분이 바로 지학순 주교이다. 그 시절은 제3공화국 군사독재의 절정기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참여는 자연히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지 주교는 몸소 투옥까지 당하면서 민주화 투쟁 선봉의 지도자가 되었다. 감옥에 갇혀있는 지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며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고 전국의 교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가 잇달아 열렸다. 이 흐름이 1980년대에까지 이어지며 결국 한국에서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회복을 구현하는 데에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지대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다만 민주화 투쟁의 선봉이었던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서 그는 농민과 광부들의 지역인 원주교구 교구장으로서 가난한 민중의 충실한 목자로서 탁월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원주교구의 범위도 벗어나서 전국 노동자 농민의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억압과 가난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이 민중사목을 위해 지 주교는 폭 넓게 협력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의 동조자들은 종교, 직종, 신분의  을 넘어선 범위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백성 자체로서의 교회 모습이었던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북한에서 출생했고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이 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하였다. 이어서 6, 25전쟁에 종군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의 분단과 전쟁을 치열한 현장의 복판에서 겪었다. 사제로서는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소탈한 벗으로서 자애로운 목자로서 보냈다. 교회는 사회의 복판에 참여해야 하며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곧 선교라고 하는 현대교회의 가르침에 스는 스스로 일치해 있었다.
  이러한 지학순 주교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후 1주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지 주교를 추모하는 많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지 주교의 현세구원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 겨레는 민주주의의 정착과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분배정의도 실현해야 한다. 이때에 지학순 주교의 정신과 행동이 우리 모우에게 더 없는 모범이 되고 분발의 원동력이 된다.
  이 기념사업회가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해 가면서 사업의 소식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며 또 긴요한 논의도 터전으로 이 회보를 발행하게 되었다. 뜻을 같이하는 여러분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는 바이다.



양 심 선 언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 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임 비상 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최소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이다. 이것들을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을 청원하거나 건의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의 보도까지 금지하며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는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 의사조차 말하지 못하게 하여 이러한 금지를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식이다.
  4) 본인이 범했다고 그들이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성 등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갖다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5) 본인을 재판하겠다고 하는 소위 비상 군법회의라는 것은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 할 수 없는 꼭두각시이다. 저들은 지금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데 있어서 비상 군법회의라 불리 우는 형사절차의 이름을 빌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동안 통제된 신문들, 통제된 방송들, 통제된 텔레비전들에서는 소위 검찰관의 증거 희박한 주장만이 사실로 나타난다.

  이상 기록한 것이 나의 기본적 주장이며 생각이다. 이 외에는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고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1974년 7월23일 아침  천주교원주교구장 주교  지학순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

  교황님!
  이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곳이지만 저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앙과 사명감에서 조용히 이 고통을 감수하며 기도드립니다. 저는 더욱 침묵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성교회의 기도에 합하여 전 인류를 위하여 정의와 평화구현을 위하여 특히 우리 조국을 위하여 조용히 무릎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교황님, 그 동안 저와 원주교구 모은 교우들에게 베풀어 주신 온갖 자부적인 사랑과 배려에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구속된 이유, 즉 죄목이란 내란 선동과 긴급조치 위반입니다. 그러나 내란 선동이라는 것은 사실무근의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저는 다만 억압받고 짓눌려 있고 민주국가에서 보장받아야 할 인간의기본권마저 빼앗기고도 말 못하는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겠다는 신념에서 이웃을 도왔습니다. 인권의 침해는 곧 하느님에 대한 목독이기에 신앙 안에서 인권의 침해로 상처받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벗을 위하여 오늘 이 땅에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외면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저는 다만 그리스도의 정의와 진리를 증거 하였습니다.
  이미 제 신변의 위협을 알고 있었지만 지난 7월6일 귀국하여 연행된 후 원주 교구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죄목에 응하지 않고 또 인위적인 타협에도 현혹되지 않고 양심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저에게 씌어진 또 다른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긴급조치법은 법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 결여된 사항으로서 양심의 표현마저 억압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기본권인 양심마저 짓누르고 양심의 굴복을 강요하는 처사로서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회복, 민주회복을 위하여 ‘양심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황님, 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인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현실을 예언자적 자세에서 고발하였습니다. 억울하게 갇혀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항 하리오”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끝으로 첨부하고 싶은 것은 저의 양심과 어긋나는 표현이 아니더라고 그것은 강압이지 결코 본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황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기원하며 저와 원주교구 모든 교우들에게 교황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1974년 9월   서울구치소에서 지학순 주교 올림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한국노사문제연구소  회장 박청산


  지난 1970년 4월28일 서울 종로YMCA 대강당에서는 기독교 단체 연합으로 버스 여차장의 삥땅에 관한 심포지움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많은 시민과 여차장들이 참석하였고, 모든 매스콤이 총 동원되었다.
  이것은 삥땅이라는 은어가 심포지움의 제목으로 등장한 것과 내용면에서는 한 소녀의 애처로운 호소에 대한 공감과 그리고 참다운 인간의 삶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인도주의가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이 심포지움을 개최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서울 시내 어느 여차장 안젤라양이 본인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회장님 제가 여차장을 하면서 매일 300원씩 삥땅을 해서 동생 학비와 어머니 병 치료비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교회에 나가지 못합니다. 제가 하는 삥땅이 죄가 되는지요?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나는 노사문제 전문가니까 와서 물어보면 해답이 나올 줄 알고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문제는 노사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 안젤라양에게 1주일 있다가 다시 오라고 약속하고 돌려냈다.
  나는 다음 날 개신교 목사를 찾아가서 이 안젤라양의 이야기를 하고 죄가 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목사 말이 남의 것을 훔친 것이니 죄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가톨릭 노동청년회에서 문의한바 그런 문제라면 원주에 계시는 지학순 주교님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다음 날 원주교구에 전화해서 지 주교님하고 통화가 되었다. 대략적인 말씀을 드리고 방문의 뜻을 전하니까 기꺼이 내려오라고 해서 다음날 중앙선을 타고 원주역에 내리니까 주교님 차가 나와 있었다.
  주교관으로 가서 지 주교님에게 인사드리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죄가 되는지요’하고 말씀드렸다. 그 때 시간이 11시 30분경이었다. 주교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본인에게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말씀하시고 당신 방에 들어가 묵상을 하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시고 나오셔서 점심식사를 함께하고 나서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말씀하시기를 “삥땅은 죄악이 아닙니다. 이 안젤라는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하고 확답을 해 주셨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답례하였고 곧 서울로 올라와서 심포지움을 계획하고 지 주교님의 강연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이뤄진 것이 1970년 4월 28일 YMCA 심포
지움이다. 4월27일 아침 7시 MBC 뉴스쇼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당시의 아나운서 임택근씨 사회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는 대담이 있었는데 거기에 지 주교님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 삥땅”이라는 주제 강연을 하셨다. 모든 사람은 정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정의의 입장에서 정의란 즉, 분배정의, 사회정의 입장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셨다. 결론적으로 그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렇게 근본적인 해결이 될 때 삥땅은 없어져야 한다고 지학순 주교님은 말씀하셨다.


빛다운 빛으로 소금다운 소금으로

                                                              이동진  시인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과 현재의 시간만이 절대적이거나 영속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남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해서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온다고 믿어서 법이고 정의고 윤리고 다 무시한 채 제 멋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른다. 굴욕에 눈이 어두운 자는 눈에 보이는 것, 자기 손에 들어있는 것, 또 자기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여, 더욱 더 재산을 긁어모으는데 열중한다. 쾌락과 명성의 추구도 마찬가지다.
  남의 장례식에 그토록 여러 번 참석하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유족을 위로 하면서도 자기만은 언제나 예외나 되는 듯이 돌아서서는 딴 짓을 한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
  물론 하루 스물 네 시간 죽음만을 명상하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 우울하고 사회발전에 해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시간은 없는 사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보람을 거두는 것인지는 적어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세상에 모래알처럼 많아진 인간 가운데에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 짐승처럼 사는 사람, 그리고 짐승만도 못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태어날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이다.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사람, 남을 위해서 끊임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지상에 투쟁이 아니라 평화를 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희귀하다.
  짐승처럼 사는 사람은 크게 남을 해치지도 않고 높은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하루하루 물질적인 만족에 젖어있는 사람이다. 태어나도 그만이고 태어나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너무나 흔하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은 남에게 극심한 고통과 피해를 끼치고 악의 유산을 남기는 사람이라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그런 부류며, 독재자, 고문하는 자, 법을 유린하는 자 등 양가죽을 쓴 늑대의 무리다. 이런 사람도 적지가 않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지나간 과거를 거울로 삼아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밝고 정의로운 오늘도 번영하는 미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을 항상 기리고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짐승만도 못하게 살거나 살아간 사람도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악의 모습으로서 기억할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학순 주교는 사람답게 산분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지 주교는 그리스도가 말한 착한 목자의 길을 평생 걸었고 양 때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70년대 초 이후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페이지를 그나마 밝은 빛으로 비추고 자유와 정의에 목말라하는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재산과 지위와 명예를 가진 대중이 공포에 질려서 침묵할 때 지 주교는 광야에서 소리치는 예언자로 용기 있게 나섰다. 그만한 용기와 결단을 보여준 지도자가 우리 사회에 누가 있었던가?
  민주화라는 시세에 따라 지금은 누구나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이름깨나 있다는 인사들은 자기 몸 하나 보전하려고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눈치 보거나 심지어는 권력에 아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치 맨 몸으로 탱크와 맞서듯이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은 지주교의 행동하는 양심은 캄캄한 밤에 길을 인도하는 북극성과 같았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주교 이전에 한 신앙인으로서 지주교는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외쳐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인간과 신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주교가 높이 든 횃불은 외롭지 않았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종파를 초월하여 수많은 양심의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지 주교를 선두로 한 이 사회의 양심세력이 그 후 어떠한 탄압을 받았는지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르고 압제의 선봉에 선 세력이 어떻게 무너지고 수치의 티끌로 돌아갔는지도 이미 역사가 되 있으니 앞으로도 역사의 평가는 지금보다 더욱 더 준엄하게 내려질 것이다.
  일제시대와 분한 후 단신월남을 거치면서 사제의 길을 걸은 지 주교가 자선사업과 교육사업 등에 남다른 애정을 기울인 사실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원주교구라는 지방의 주교서로 우리나라 전체를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가 되고, 양심의 거울이 된 것은 두고두고 음미할 가치가 있는 특이한 업적이다.
  물론 지 주교는 공명심에서 행동하지 않았다.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정말 진심으로 형제로 대했다. 주교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실을 훈장처럼 내세우지도 않았다. 인간 지학순으로 살아갔고, 착한 목자로서 자기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우리에게 이토록 감명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71년 12월말에 ‘금관의 예수’라는 희곡을 발표하고 그 대본으로 전국순회공연을 할 때 사실 우리 가톨릭교회에 지학순 주교와 같은 위대한 착한 목자가 출현하기를 갈구했다. 그런데 지 주교는 71년 10월에 이미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규탄을 위한 대회를 원주에서 가지고 횃불을 들었다. 그것을 나는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지주교가 갈망하던 정의의 자유가 과연 우리 사회에는 충분히 실현되었던가? 과자보다 라면이 좀 더 많아지고 눈에 보이는 자동차가 더 많아졌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정의와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을까? 불의와 억압과 부패의 세력이 감추었을까? 원대한 미래의 민족 문제는?
  사람답게 달아간 지주교를 새삼 추모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사람은 많지만 정작 추수할 사람은 적다는 2천년 전 그리스도의 탄식을 지 주교도 아마 생전에 하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완성 작품인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오늘 지주교의 생애를 거울 삼아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부지런히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이야말로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30  들빛회 소식지 제4호  justice 2007/01/11 4093
29  들빛회 소식지 제3호  justice 2007/01/11 4463
28  들빛회 소식지2호 입니다.  justice 2007/01/11 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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