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1-11 17:51:08, Hit : 4462
 들빛회 소식지 제3호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회보 제3호

정의가 강물처럼


  지학순 주교님께
박형규 / 목사(본회고문)

  지주교님!
  영원한 안식처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곳으로 주교님 떠나신지 어언 2년이 지났습니다. 저도 머지않아 주교님 계신 그곳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 많은 얘기 나눌 수 있겠지요. ‘기념사업회’에서 저더러 글을 쓰라기에 대답만 해 놓고는 무엇을 쓸까 망설이다가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작심하고 전에 주교님 만났던 일을 회상도하고 또 요즘 저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도 하면서 주교님께 편지 한 장 띄울까 합니다.

  제갸 주교님을 처음 뵙던 때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60년대 말 김지하 시인이 “   ”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원주에서 주교님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지하는 감옥에서 풀려나자 저를 찾아왔었지요. 그때 저는 기독교방송의 상무이사였으니까 혹시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줄 수 있을까 하구요. 지하를 방송원고 필자로 고용하자는 저의 제안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방송국 경영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사회는 지하가 방송국 근처에 오는 것조차 위험시 했었습니다. 얼마 후에 주교님께서 지하를 거두어 주셨다는 조식을 듣고 저는 얼마나 마음 든든해 했는지 모릅니다. 아직 뵌 적이 없는 주교님이 거인으로 여겨졌고 반면에 제 자신의 왜소함과 무능을 부끄러워 했었습니다.
  어쨌든 김지하를 매개로 해서 주교님과 저 사이에 사회정의의 실현과 정치적 사회적 부정부패의 일소라는 과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고 후에 저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믿게 됐습니다. 1971년 10월5일 주교님이 원동성당에서 ‘부정부패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집전하신 후 1천5백 t니자와 함께 가두행진을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우리는 이제야 군자독재에 대한 기독교의 투쟁이 선포됐다며 환성을 올렸었지요. 그리고 원주교구의 의거에 호응하기 위해 우리는 10월8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 학생관에서 ‘기독교 사회행동협의체’ 소속 신, 구교 정직자 26명이 미사와 성찬식을 겸한 특별예배를 드리고 나서 ‘사회정의 실현’ ‘부정부패 일소’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기독교회관까지 소금과 빛의 침묵행진을 했었습니다. 그 때 주교님께서는 서울에서 대규모의 집회와 행진이 일어나기를 바라셨다는데 우리의 역량이 지주교 한 사람의 힘의 백분의 일도 되지 못했던 거지요, 빛의 상징으로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소금을 든 예복 차림의 성직자들의 행진은 당시 아직 그 부근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 의대, 법대생들에게는 꽤 자극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주교님의 권두언 한쪽 분량 원고지 7~8매를 쓰라는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대한 저의 분통을 털어놓자면 앞으로 백장을 더 써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지주교님이 시작하신 ‘사회정의 실현과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시위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유효할 뿐 아니라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노인이라는 것이 뭔가를 조금은 알게 된 요즘입니다만 기회와 기력만 허락된다면 주교님 상대로 제 넋두리 몇 번 더 해볼 작정입니다.  1995년 5월6일  박형규 올림

양심, 선한 지향 운동의 바탕

강태용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부 주관사제(본회회원)

  얼마 전 서울 종로성당에서 친구 따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쇠붙이를 취급하는 공장을 경영하는데 지난 십여 년 간은 정말 어려움이 많았답니다. 부도가 나서 도망 다닌 적도 있고, 고생도 많이 했답니다. 요즘은 형편이 좀 나아졌고  내년쯤이면 훨씬 더 좋아질 것 이라면서 기분 좋게 희망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수 년 전, 자기 회사가 부도났을 때, 어떤 친구는 격려의 말로 위로해 주었고, 또 어떤 친구는 소액이라도 도와주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서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평소에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던 한 친구는 자기에게 너무나 서운하게 대해 주더라면서 “어 강신부, 사람이 돈 떨어지니깐 말이야 개 취급하더라구, 참...”하면서 고생스러웠던 지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에 답사라도 하듯이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거봐, 개도 개 나름이겠지만 개 값도 상당하잖아! 개 취급당한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나는 말이야 사기꾼 신부라는 호칭을 받았다네. 내가 남에게 사기 친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그 친구는 어째서 강신부가 사기꾼 신부라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 말 좀 해보라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사기꾼 신부 호칭을 받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루는 한 식당에서 국수로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식당주인과 우리 일행은 막연한 사이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식탁에 둘러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그 식당 주인은 특별메뉴라면서 조그마한 그릇에 고추장을 담아들고 우리 식탁 가까이 오면서 “어, 강신부 사기꾼이 되었구먼...”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았습니다. 나와 우리 일행은 약간 당황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아, 어쩌면 나는 사기꾼 신부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선한 강론을 해 놓고도 내 스스로는 실천 못한 사항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야...’라는 생각, 부정적 긍정적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막 스쳐지나 가는데 그 식당 주인이 친구는 연이어 또 한마디 더 했습니다.
  ‘나는 말이야, 젊은이들이 새로 사제로 서품 받을 때마다, 아! 젊은이들이 아깝게도 또 사기꾼이 되는구먼 하고 탄식한단 말이야...’라고 폭탄적인 말을 내 뱉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기꾼 신부’라는 말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나는 독일 엣센시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서 여러 날을 묵으면서 잘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귀국 전 날 우리는 술 한 잔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친구는 나에게 “어, 강신부 귀국하면 말이야 먼저 ‘양심운동’부터 시작해, 사목도 선교도 중요하지만 양심운동이 바탕이 되어야 되네, 성직자들부터 양심대로 a라하고 양심대로 생활하는 모범을 보여야 돼! 양심운동 안 하면 나라도 세상도 다 희망이 없게 되네...명심하게!”라면서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에 사는 그 좋은 친구의 말을 명심합니다. 그런데 양심대로 산다는 기준은 어디까지 일까? 그리고 신부는 왜 사기꾼으로 보일까? 나 자신은 양심대로 살아보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기꾼 신부라는 딱지는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몇 년 전 ‘크린랩’ 사건으로 검찰에 고발되었던 고영수 교수님이 5년여 법정투쟁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식생활에 사용되는 ‘크린랩’에 유해물질이 들어 있느냐 안 들어 있느냐 하는 시비가 있었습니다. 고영수 교수님은 학자의 양심을 걸고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양심 없는 학자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후 5년여 법정투쟁에서 고영수 교수님의 양심은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무죄판결로 승리하였습니다. 양심 이야기를 하니깐 70년대 어둡고 추운 긴 겨울밤과 같은 시대에 양심대로 말하고 양심대로 행동할 수 없었던 시대가 생각납니다. 한밤중처럼 캄캄하여 앞을 내다볼 수도 없이 괴로웠던 그 시대에 살아있는 한 양심이 있었습니다. 그 양심은 밝고 빛나는 횃불을 밝혀들고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폭력에 의해 철창에 갇힐 것을 각오하고 “빛이 되어라!”라는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바로 그분의 ‘양심선언’ -1974. 7. 23 아침-이었습니다. 그 양심선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유신 헌법의 부당성을 하느님께 고발한 한 예언자의 진실 된 외침이었습니다.
  요즘 ‘세상 살리기 운동’ ‘지구 살리기 운동’ 등 선한 지향의 운동들이 많습니다. 좋습니다. 환경도 살리고 인간성도 회복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운동은 온 세상에 두루 퍼져서 충만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만방에서 꽃 피우고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선한 지향의 운동도 바탕은 양심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양심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꼭 양심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양심대로 사는 모본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양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세례 받을 때 양심대로 살겠다고 이미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I 베드로 3:2 참조)

빛과 소금의 길
지학순 주교(1921~1993)

이태호 / 평화신문 비상임 논설위원

  구름이 해를 가렸다.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어린이도 훌쩍였다. 어른도 울먹였다. 아저씨도 눈시울을 적셨다. 추기경도 애통해 했다. 구두 닦기도 눈물 흘렸다. 쌍다리 밑에서 구걸하다 그의 도움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 왕년의 거지들도 울었다.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로 그와 함께 한 때 영어의 몸이 되었던 사람들도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슬픔을 함께 했다. 1993년 3월12일 0시 40분 세상을 떠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영결미사가 있던 3월 16일 원주시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5천여 인파가 원동성당 안팎을 가득 메웠다. 좁은 성당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당 관계자들은 멀티비전을 설치 해 미사 광경을 지켜보며 조의를 표하였다.

  행동하는 正義의 표양
  “주교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셨으며 또한 소외받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추도사가 이어지자 영결미사에 참석했던 거의 모은 사람이 흐느꼈다. “주교님께서는 항상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삶의 낙원을 만들어 주시려고 온 몸으로 애쓰셨습니다.” 추도사가 여기 이르렀을 때도 조객들은 눈물을 떨구었다. 15개 교구장과 1백20여명의 사제가 공동집전한 이날 영결미사는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돌보고 이 땅의 구조악을 향햐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의의 표양을 세운 지학순 주교의 일생이 결코 외롭지 않았음을 웅변했다. 또한 영광스런 구원의 역사는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날 미사는 보여주었다.
  “1965년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부임하고 난 직후였습니다. 당시 탄광촌에 가려면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려야 하는데 역무원들이 자꾸 역장실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역장실 귀퉁이에 앉아 있곤 했는데 거기서 그들이 석탄 차 배정을 둘러 싸고 탄광 측으로부터 ‘교제비’를 상납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부에서 감사가 나오면 다시 그 돈으로 적당히 무마하는 것도 목격했지요. 1960년대 말 탄광촌에서 온몸에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사제의 사회적 소명을 느꼈던 저는 아이들이 석탄칠을 하고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있는데 사회부패 이거 큰일 났다 싶어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생전에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사회구원의 길로 사목의 방향을 잡은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교회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의 편에서야 한다는 사실을 지주교는 힘주어 말했고 또한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권력을 고발하는 길로 들어선다. 지학순 주교의 분노는 1971년 10월  5일에 터졌다. 지주교의 지휘아래 원주 시내 3개 본당 평신도들은 총궐기하여 “부정, 부패를 추방하자”고 외쳤다. 이날 1천5백여 신자들은 지주교가 원동성당에서 집전한 부정, 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에 참여하여 기도한 후 사회에 만연된 부정 부패를 규탄했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의미를 띤 이 모임은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 추방운동의 누룩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 이른바 ‘10월 유신’이 박정희 대통력에 의해 선포되면서 이 땅이 독재의 나락으로 떨어 졌을 때 지학순 주교의 진노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공, 사석에서 기회 있는 대로 유신헌법을 비판했다. 서울대학생 이철군을 중심으로 한 ‘민청학련사건’이 암흑과 침묵을 깨뜨렸다. 이 사건과 관련해 대학생, 교수, 성직자, 문인 등 2백53명이 1974년 4월 구속됐다. 시인 김지하도 대학생들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됐다. 지학순 주교는 김지하에게 “의로운 운동에 쓰라‘고 1백20만원을 준 혐의로 1974년 7월6일 해외에서 귀국하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됐다. 김지하 시인은 “당시로는 큰 돈이었다. 당시 살벌했던 상황으로 볼 때 지주교님은 중요한 결단을 한 것이다. 그 돈은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는데 기름 역할을 했다”고 술회한다. 7월10일 중앙정보부에서 일단 풀려난 지학순 주교는 당뇨병이 악화되어 명동 성모병원 621호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2명의 중앙정보부 요원이 병실을 감시했다. 지주교에 대한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던 7월23일 오전 8시 원주교구 성직자, 평신도들이 상경하여 마당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병실에서 기도하던 지주교는 확성기를 통해 원주교구 신자들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신부, 수녀들의 엄호를 받으며 1백여명의 원주교구 신자 앞으로 다가가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 자리에서 지주교를 격려했다. 여기서 지주교는 미리 준비해온 양심선언을 발표한다. 인권운동 사상 중요한 문서로 평가되는 이 선언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신헌법 무효화 투쟁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불가양도의 기본 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ㅣ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의 하나다. 그들이 본인이 범했다고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갖다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본인을 재판하겠다고 하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는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없는 꼭두각시다.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반면, 통제된 신문들, 통제된 방송들, 통제된 텔레비전들에서는 소위 검찰관의 증거 없는 주장만이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한 비상군법회의는 8월9일 지학순주교에게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옥중에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자 1975년 2월17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인권회복 기도회를 갖고 지주교의 석방을 기원해 온 한국 천주교회는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길에 옷 깔고 석방환영
  ‘정의와 진리는 기필코 승리한다. 지학순 주교 만세’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앞세운 원주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와 원주 시민들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복자찬가’와 ‘우리승리 하리라’를 우렁차게 불렀다. 그들은 “우리는 원한다. 양심과 자유를” “우리는 살고 싶다, 인간다운 세상에서”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원주시민의 거의 절반가량이 거리에 나와서 저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2월 달 이어서 아주 추웠습니다. 신자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습니다. 나더러  그걸 밟고 걸으라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예루살렘 입성하는 예수그리스도 대접해 준거죠. 그 때 감회를 잊을 수가 없어요...” 훗날 그는 당시 열기를 전하여 눈시울을 붉힌 일이 있다.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받은 지학순주교. 그의 수난은 한국천주교회로 하여금 정의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되었다. 추기경도, 주교도, 신부도, 수녀도, 평신도도 한마음이 되어 지주교의 건강을 빌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권의 회복을 염원했다.
  이런 도도한 흐름을 타고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1974년 9월23일 결성되었다. 사제단은 정의구현과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수시로 개최했다. 기도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이 가두데모도 벌였다. 지학순주교의 구속을 항의하며 인간의 기본권 수호를 위해 일사불란한 자세로 나선 천주교회는 이 무렵 인권을 중시하는 종교, 용기 있는 종료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지학순 주교는 석방된 후 로마를 방문했다. 교황청 당국자 간에도 지주교의 현실 참여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성직자는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다른 성직자는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느냐”로 꾸짖었다. 지주교는 그날 밤 숙소에서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산 것이 잘못이라면 누굴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얼마 후 인류복음화성 차관이 지학순 주교에서 “내일 교황성화를 알현할 준비를 하라”고 전화로 알렸다. 지주교는 ‘교황성하가 꾸짖으면 무엇이라고 변명하나’ 걱정이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지주교는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두 손을 벌리고 그를 껴안으며 “뚜 에스 보누스 빠스또르!(너는 착한 목자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학순 주교는 이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교황성하!”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였다. 정의는 외롭지 않았다.
  눈물은 지학순(다니엘)주교의 일생을 상징한다. 그는 눈물 많은 성직자였다. 눈물이 흐르는 동안 그는 살아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는 선종했다. 그가 다시 우리 앞에 오지 않는 한 우리는 이제 그의 눈물을 볼 수 없다. 지학순주교의 눈물은 한국 현대사의 눈물이었다. 고통과 울분과 설움이 뒤엉킨 한국 현대사의 굽이굽이 마다 눈물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 그는 여기, 고인 눈물을 쏟아놓았다. 지주교의 눈물은 또한 인정의 눈물이었다. 인간적인 사람만이 뜨거운 가슴으로 운다. 그는 애처로운 모습을 접할 때마다 하염없이 울었다.

  울분, 설움 녹인 “눈물”
  1921년 9월9일 평남 중화군 청학리에서 구교우인 지태린과 김태길의 6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지학순주교는 한남 덕원신학교 학생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점령군으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천주교회를 집요하게 탄압하다가 1949년 5월4일 덕원신학교 독일인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신학교와 성베네딕도 수도원을 폐쇄했다. 로메로 교장 신부는 지학순 학생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지학순 학생의 눈시울도 젖었다. 감금상태에 놓인 신학생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사이에 학교 맞은편 언덕에 올라온 마을 처녀들이 오랫동안 손수건을 흔들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지학순 학생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날 저녁기도를 드리고 지학순 학생과 윤공희 부제는 같은 방에서 잠자리로 들어갔다. 만감이 교차된 지학순 학생은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뜨거운 눈물이 넘쳐 귓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분한 감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잠을 깬 윤부제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지학순 학생은 “나도 몰라...”하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수도원의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모조리 체포한 군인들이 성당 안에 있던 성모상과 성 요셉상을 모조리 깨뜨려 마당에 버렸다. 일주일 동안 이러한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지학순 학생은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성모께 기도할 뿐이었다. 8일째 되던 날 저녁 신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포로처럼 끌려 나갔다. 지학순 학생을 비롯한 신학생들과 마을 신자들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신자들 집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신학생들은 기차시간 때문에 아침식사도 못하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마을 신자들은 공산당원들이 감시하고 있는데도 밥을 한 광주리씩 이고 정거장으로 쫓아왔다. 그들은 정거장 마당에 밥을 퍼놓고 학생들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신자들과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물만 흘렸다.
  기차가 오자 학생들은 차에 올랐다. 신자들은 쫓아오며 밥 광주리를 차창 안으로 들여보냈다. 기차가 움직이자 1백여명 여의 신자와 그 지방에 남은 학생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지학순 학생도 울며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기차에 타고 있던 손님들이 자초지종을 듣고 공산주의자들을 욕했다. 평양에 도착한 지학순 학생은 얼마 후 부주교 김필현 신부로부터 “홍용호 주교님이 납치된 것을 비롯하여 이곳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하루 속히 서울로 알려 로마에 보고해야 할 테니 네가 당장 서울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울로 가서 성직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던 지학순 학생은 그날 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월남 길에 올랐다. 지학순 학생은 기차 편으로 해주를 떠났다. 해주성당에 도착한 그는 한윤승 신부가 이미 납치된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그는 한 여신자의 도움으로 안내자들을 소개받아 다른 월남 희망자들과 함R께 38선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한 안내자의 밀고로 붙잡히고 만다. 38선 경비병들은 성직자가 되려는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여자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비좁은 방에서 여자들 틈에 낀 그는 고통이 심했다. 유치장은 불결하여 머리칼을 털면 이가 수북이 떨어지곤 했다.

  여자 유치장에 수감 돼
  여자 유치장에서 2주일 가량 있다가 남자 유치장으로 옮겨진 그는 유치장 돌담이 무너녀, 이것을 쌓기 위해 돌을 운반하는 노역에 동원됐다. 두 명이 짝이 되어 들것에 작대기를 꿰어 돌을 가득 담아 어깨에 메고 여러 날 날랐다. 어깨가 멍이 들고 부르터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러한 생활을 한지 50일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지학순 학생은 석방될 때 공산당이 스파이를 붙여 놓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함께 석방된 젊은이가 접근해오며 사실은 내가 안내업을 하는 사람인데 다시 서울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까지 대접받았다. 그는 밤에 지학순 학생을 무논길로 데리고 다니다가 해주 교외의 경찰서로 데리고 들어가 두 번째로 잡히고 말았다. 포승줄로 손이 묶인 채 심문을 받아야 했던 지학순 학생은 손목이 뒤틀리고 아파 눈물을 떨구었다. 경찰은 “서울로 가는 진짜 이유가 머냐”고 물으면서 쇠막대기로 지학순 학생의 등을 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기절했다. 다시 정보보위부로 옮겨진 그는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심문을 받았다. 그는 새벽 6시가 되면 일어나야 한다. 늦게 일어나면 가죽띠로 갈겼다. 이른 바 잠 안재우기 고문을 그들은 가한 것이다. 나흘 만에 바뀐 취조관은 외사촌 형의 친구라고 했다. 그는 “다시 잡히면 큰일난다. 꼭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 달만에 지학순 학생은 석방됐다. 쓰러질듯 비틀걸음으로 해주 성당을 찾아갔으나 성당은 이미 보안서(경찰서)로 변해 있었다. 그는 모녀가 가게를 하는 성당 부근의 신자 집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방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입을 열 기운도 없어 눈물만 흘렸다. 이 집에서 일주일 동안 앓은 후 다소 기력을 회복한 그는 사리원 교외에 있는 사촌 동생 집에 들렸다. 동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형이 서울로 떠난지 한 달만에 해주에서 잡혀 죽었다는 소문이 큰어머니에게 들렸어요. 큰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실신하여 누우신지 한 달만에 형의 이름만 부르시다가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지학순 학생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말을 듣고 동생과 뒤엉켜 한없이 울었다. 곧장 중화면 집으로 갔다. 대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형수가 흐느끼며 쓰러진다. 그도 이웃 사람들도 곡성을 터뜨렸다. 그는 아버지와 합장한 어머니의 묘소 앞에 쓰러지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이 불효자식이 왔습니다...” 9월 하순 짧아지는 해가 서산마루에 걸쳤다. 풀벌레 소리와 갈대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그의 울음소리에 섞여 긴 여운을 남겼다.

  45년만의 첫 공식미사
  민족의 비애와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가슴 속에 함께 간직한 지학순 학생은 1950년 1월17일 믿을 수 있는 안내자를 만나 윤공희 부제와 함께 38선을 넘는데 성공한다. 6, 25전쟁 중 국군에 지원 입대하여 1952년 2월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부상한 그는 곧 제대하여 성신대학에 편입학한다. 1952년 12월15일 동료들보다 훨씬 늦게 사제로 서품된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군종신부를 거쳐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 대학에 유학한다. 그는 이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1965년 6월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달 29일 주교로 성성된다. 원주교구장으로서 교구 업무를 꼼꼼히 수행하고 인권 탄압에 항거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해온 지학순 주교는 북에서 돌아가신 부모와 살아있는 가족, 친지 들은 물론 ‘침묵의 교회’에서 고통 받는 동포들을 잊지 못한다. 1985년 대한적십자가가 주도하여 남북한 이산가족이 평양에서 만날 기회가 왔다. 지학순 주교는 자진해서 관계당국에 찾아가 “나도 방문단에 포함 시켜달라고”고 간청했다. 9월20일 오전 7시 반에 남산 적십자사 본부를 출발한 버스는 판문점을 거쳐 휴전선을 넘었다. 35년 전 심장이 얼어붙는 듯 한 긴장 속에 38선을 넘어 월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9월21일 오후 3시 반 지 주교는 이산가족 상봉실로 나갔다. 홀이 떠나갈 듯 크게 “오빠”하는 소리가 났다. 지주교가 “너 용화냐?”하고 물었다. 누이 동생이 “그래요”하고 지주교이 목에 매달리며 엉엉 울었다. 지주교도 목이 메어 눈물만 펑펑 쏟았다. 누이동생은 대뜸 “오빠, 우리는 천당에서 살아. 김일성 수령님의 덕으로 우리는 천당에서 살아. 오빠는 무슨 천당이 어디 있다고 천당 가겠다고 그래. 속아서 살았어, 속아서 살았어”라고 말했다. 어려서 함께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누이동생의 입에서 첫 마디가 이렇게 나오자 지주교는 화가 벌컥 났지만 참으며 “그래 너 세뇌 많이 됐구나!”라고 동정했다.
  이튿날 오전 7시 반 지학순 주교는 성직자가 되어 북한에 들어와 처음으로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지주교는 미사도중 순교자들의 피를 언급하다가 목이 메어 한 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방문단으로 동행한 신자들도 비신자들도 울었다. 그것은 뜨거운 눈물의 미사였다. “2백년 전에 순교자들이 1만 명 가까이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쳐서 이 나라에 광명과 자유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도 40년 동안 순교의 피를 흘렸으니...평화가 올 때도 됐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갖고 진실한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학순 주교는 울먹임을 기원으로 승화시켰다. 지학순 주교는 소외된 이웃의 어버이요, 벗이었다. 병들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경제적으로 쪼들림을 받고 있으며 폭력에 짓밟히고 있다. 그들은 이웃의 도움을 갈구한다. 지주교는 그들의 목마름을 진실로 적셔주었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자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르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등을 자신과 일치시켰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그분은 말했다.
  지학순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강론과 연설을 통해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졌고, 정부 당국의 각성을 촉구했으며, 소외된 현장의 한복판을 찾아가 ‘작은 예수 그리스도들’을 실제로 도왔다. 그는 소외된 이웃을 일관되게, 온 힘을 다하여, 전 방위적으로 사랑했다.

  “소외된 이웃의 어버이”
  그는 가난을 가슴 아파 하면서 그것을 제도의 소산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그는 강론을 할 때 모순과 비리가 판을 치는 현실을 꿰뚫어보고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부자의 이기심과 정부의 민중 소외정책을 맹공했다. “근로자와 농민이 다 같이 수탈 당하고 있는 근본 원인이 그들의 게으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못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정부의 근로자와 농민에 대한 억압정책, 더 나아가서 정부의 경제 성장정책 그 자체에 있습니다. 정부의 수출정책은  저 임금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 출입 정책을 강행하는 한, 임금의 인상은 억제될 수밖에 없으며, 악덕 기업주들 역시 정부의 이러한 입장을 악용하여 더욱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 근로자의 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보는 또 저곡 가정책을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은 곡가 정책을 쓰면, 저 임금을 받는 도시 근로자의 생활이 파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있는 부모는 저곡가 정책으로 인하여 생계비에도 미달되는 수매 가격으로 희생되고 있으며, 한 푼 벌이라도 하기 위하여 도시의 공장에 나가는 그 아들 딸 들은 저 임금 정책에 의하여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밖으로 농민과 그 가족들은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강론집 ‘정의가 강물처럼’ 221~222쪽)
  그는 정부에 대해 노동자, 농민 억압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각성과 단결을 호소하기도 했다. 1977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강론에서 그는 노동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노동자들이 아무 소리 없이 가만히 있는데 기업가들이나 정부가 선심을 써서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준다는 것은 순전히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이런 일은 슬프게도 역사상 있어본 일이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생활을 개선시키고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단결된 투쟁뿐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억눌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우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을 발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위의 책 243~244쪽) 1970년대에 노동자, 농민의 참상과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그들의 몸부림을 현장에서 취재한 바 있는 필자는 노동자, 농민의 고통에 동참하여 약자를 짓밟고 억누르는 기업가와 정부 당국자의 맹성을 촉구하는 지학순 주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핍박받는 자들의 곁을 찾은 그의 눈길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1970~80년대 노동운동 지도자였으며 지금은 ‘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인숙씨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절에 정의를 외치는 노동자들이 줄줄이 교도소로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줄어갈 때 물심양면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지주교를 찾아간 일이 있다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주교님은 다른 손님과 얘기 중에도 노동자들이 찾아가면 우선적으로 만나주셨다.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주교님을 찾을 때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좋은 일로 찾아뵈어야 하는데 번번이 그렇지 못해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지주교님은 ‘궂을 일 있을 때나 오지 왜 오느냐 평소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버스 안내양들이 기아임금과 장 시간 노동에 혹사당하던 19709년대 ‘삥땅’이란 말이 유행했다. 안내양들이 버스 요금의 일부를 숨겨 생활비로 보태 쓰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인 안젤라양이 매일 3백원 씩 삥땅을 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동생의 학비를 댔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성당에 나가지 못하던 그녀가 “제가하는 삥땅이 죄가 되는지요?”라고 한국 노사문제 연구소장 박청산씨에게 물어왔다. 박시는 자문을 얻기 위해 지주교에게 찾아갔다. 지주교는 주교관 서재로 들어가 한참 묵상한 후 응접실로 나와 박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삥땅은 죄가 아닙니다. 안젤라는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정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정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기본적 인권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안내양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가지고 간 것 뿐입니다. 힘 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들이 안내양들이 삥땅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박씨는 너무 기뻐서 지주교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서울로 돌아와 안젤라 양을 격려했다. 박씨는 1970년 4월28일 YMCA에서 삥땅문제 심포지엄을 열고 지주교를 초빙하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 삥땅’이란 강연을 하도록 했다. 지주교는 안내양들의 인권 차원에서 삥땅문제를 접근하여 저 임금과 혹사를 시정할 것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의 열딘 박수로 지주교의 견해에 공감을 표시했다. 지학순 주교는 1985년 3월 ‘경향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회 내부를 향해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케 하는 뼈아픈 지적을 하기도 했다.
  “잘 아시다시피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며 영광스러운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도와 보속과 사랑을 실천하는 특별한 시기다. 기도하고 절제하는 그 자체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절제하고 저축한 것을 가난하고 불행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무조건 자기 본당 신부만 위하는 것이 열심한 신자인 것으로 착각하는 교우들을 가끔 본다. 보신탕이니 예물이니 뭐가 그리 많은지..그것으로 차라리 주위 이웃 사람에게 연탄 몇장이라도 사다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는가. 우리 신자들의 신앙에 관한 정신 연령이 좀 높아졌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을 성당에서 쫓아내고 빈 성당만을 지키고 있다”고 개탄해 온 지학순 주교는 ‘교회가 쫓아낸 예수’를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찾아나섰다.

  윤락여성 새 삶 찾아줘
  1973년 겨울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봉사단체인 청송회 회원들과 함께 평창군 대화면 대화공소에서 동남쪽으로 10km쯤 떨어진 해발 1천2백m의 험준한 산골에 자리잡은 정수동을 찾아갔다. 그는 눈이 무릎까지 차는 가파은 산길을 신발에 새끼를 감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다가 세 번이나 넘어지는 강행군 끝에 4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주교 일행은 60살이 넘는 노인들에게는 이불을 선사했다. “평생 이런 이불은 구경도 못했다”고 노인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지주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지체 장애인 김대연씨(당시74)와 다른 할머니 등 두 사람을 격려하고 훗날 청주 양로원으로 보내주었다. 일행은 15살부터 전신마비로 누워 지내는 박선옥양(당시 34세)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용변 볼 때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지사제(止瀉劑)를 선물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웃들이 유난히 많은 원주교구를 이끈 지 주교는 소외된 이웃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으로 감싸려고 노력했다. 그는 1972년 봄에 윤락여성이 많이 살던 원주시 학성동 희망촌에 2백 여 명의 윤락여성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미장원을 세웠다. 윤락여성들은 미장원을 공동으로 운영하며 이익금을 자활기금으로 모아 한명, 두 명 새 삶을 찾아 나섰다. 그는 광산촌을 찾아가면 으레 가난한 광부들의 집을 둘러보고 방에도 들어갔다. 얼굴이 시커먼 광부 자녀들을 쓰다듬으려 “하느님 믿으며 착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친부모처럼 타이르곤 하던 그의 모습을 광부 교우들은 잊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부들에게도 광산 현장에서 피부에 와 닿는 사목을 하라고 독려했다. 1972년 8월19일 남한강이 넘쳐 강원도와 충북의 남한강 유역이 물바다가 되었다. 지주교는 물이 덜 빠져 구두가 흙탕물 속에 잠기는데도 수해 현장을 찾아가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서독 주교단과 국제 까리따스 외에 긴급 지원을 요청해 식량보조사업, 생산 기반 조성사업, 부락개발 사업, 지역산업 개발 산업 등 4단계로 나누어 불행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의 곁에 지학순 주교는 항시 있었다. 그는 2년전 사순절 기간 중에 가난한 사람들을 곁에 두고 선종했다. 다시 사순절이 왔다. 3월12일로 고인의 2주기가 다가온다. 소외된 이웃들이 아직도 많은데 어찌 차마 눈을 감았을까. 님이 간 그 자리가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음을 우리는 이제야 안다.

  편집자 주
  본 글은 이태호선생(평화신문 비상임 논설위원)께서 95년 2월19일자, 2월26일자 3월5일자 등 3회에 걸쳐 평화신문 ‘빛과 소금의 길’의 기획기사로서 쓰신 내용이다. 본 글은 특히 지학순 주교 선종2주기에 때 맞춰 지면에 발표됨으로서 고인의 추모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본 회보는 전체 내용을 묶어 ‘특집’으로 구성 해 보았으며 이를 허락 해 주신 이태호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민족이 나아갈 길
장을병 교수 / 전 성균관대 총장(본회 자문위원)

  제가 이 곳 원주에 오게 된 이유는 2가지입니다. 존경하는 ‘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 이돈명 회장님의 부탁이 첫째요. 다른 하나는 나 자신 존경의 념을 갖고 있었고 내 고향 삼척에까지 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불어넣어 주신 지주교님의 고마운 뜻에 대한 보답으로입니다.
  지학순 주교님은 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통해 3가지의 뚜렷한 자국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구속이 집행되시면서 밝힌 ‘양심선언’입니다.
  둘째, 민청학련사건 재판에서부터 나온 ‘정찰제 재판’이란 용어입니다.
  셋째, 지주교님의 구속으로 비롯된 가톨릭 신부님의 ‘정의구현 사제단’의 결성입니다.
  저는 지주교님의 이념을 감히 이렇게 요약해 봅니다.
  “어떻게든 이 땅에 민주화를 실현시켜야겠다는 것과 통일을 이룩해 내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최대의 과제를 꼭 실현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라고 저는 정리 해 보고 싶습니다.
  지주교님이 부르짖었던 ‘민주화’는 우리네 국민들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해외동포들이 다른 종족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하며 이것이 세계회의 첫 걸음입니다. 문민시대의 도래란 민주화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할 때 과연 우리네 민주화는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
  민주주의의 단계를 민주적인 헌법체제의 수립 -> 문민화의 실현 -> 반민주적 악법의 개폐, 법 질서의 개편 -> 민주적 관행의 정착 등 4단계로 보았을 때 우리는 둘째 단계를 넘고 셋째 단계에 와 있을 뿐입니다. 결코 만족한 단계에 온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바라볼 때 초조해 집니다.
  첫째, 정치는 기대치를 높여서는 안 되는데 문민정부는 한 때 97% 지지를 좋아하고 자만했습니다. 도대체 그 문제점을 아는지, 정치는 50%의 지지계층을 만드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요즘 지방 자치단체 선거 실시 문제가 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절대 연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는 학생을 고등학교에 집어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 국민약속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위해서도 꼭 지자체를 실시 해 주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셋째, 여론의 압력을 통해 비판, 반대의 기능을 억압하는 현상이 서서히 나타타고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독재와 민주주의의 구분을 ‘그 나라의 정치체계 속에서 비판, 반대의 기능이 활성화되고 있으면 민주주의이고, 그것이 억압되거나 봉쇄되어 있으면 이건 독재다’라고 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왜 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악의 행위’입니다. 그럼으로 언제나 잘못할 수도 잇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비판, 반대의 기능으로 그 저질러진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민주주의가 파멸하지 않고 영속해 갈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강점이고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까닭입니다. 요즘 아직까지는 문민정부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기는 성급하고 이를 런지 모르겠으나 정치는 항상 경계를 해야 합니다. 왜, 권력은 항상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주의를 꼭 완성해야 합니다.
  지학순 주교님께서 추구했던 또 하나의 이념은 ‘통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에 남북이 통일된다면 우리는 약소국이 아닙니다. 인구로 봐도 7,000만의 대 국가로 비약하며 경제력도 남북 상호 보완의 관계에 서면 무시당하지 않을 힘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분단이 된 요인들을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조금만 짚어보면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우리 광복군 2개 지대의 역할 무위가 그 하나요, 브롱스 카핑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는 분통터질 원한의 38선이 그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과정이 다른 하나입니다. 물론 분단이 고정되는 과정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 당시 정치세력 간에 정치 상황은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 스스로의 세력들 간 단결심, 통합을 이루지 못한 반성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늘 논의되는 이야기이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무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북의 경제적 격차가 너무 크고 또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통일은 곤란합니다. 우리의 통일을 외국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해야 하는데 경제력 문제로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북한을 원조하며 도우고, 폭 넓은 접촉으로 점진적 신뢰를 쌓으며, 평화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 무력 감축을 통한 경제력 성장의 길을 통해 통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인 민주화와 통일의 문제를 여기서 끝내면서 생각해보면 지주교님의 영혼이 여기 계시다면 첫 번째 이야기는 잘했다 할 것인데 두 번째 점진적인 통일에 대해서는 마음에 안 들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즉시, 성급한 통일을 원하셨기에....두서없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우리 주교님

김승오 / 가톨릭 농민회 지도신부(본회 회원)
“혼란 없는 안정적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정부를 반대한다면 그는 빨갱이다.”
군사독재의 논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민중들의 논리

지학순 주교님은 민중들의 처지를 이해하셨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함께 그 고통에 몸을 담그셨다.
그 분이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함께 하셨다.
마지막에는
질병에 의한 고통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를
깨달으셨다.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비극적인 민족의 아픔을 다 체험하시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남겨놓으셨다.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
말없이 이름없이 민족을 지켜왔던
수 많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그 분의 소중한 유산을 지키고자 한다.

온 생명이 함께 사는 삶
‘한 살림’과 함께 생명살림 세상을’

박재일 / 한 살림 회장(본회 집행위원)

  미래가 없는 삶을 중단하자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편리한 세상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모두 돈을 향해 서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와 편리에 비례해서 모두의 삶도 행복해 질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안과 위기감은 높아가고 있습니다. 유산을 빨리 받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가 하면, 지존파 사건에서처럼 불공정한 돈 벌기 경쟁에 대한 불만이 살인공장으로까지 갔습니다. 자고나면 떼죽음의 현장이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에 눈을 뜨기가 두렵습니다.
  미련스럽게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형 살상 사고와 사건을 접해서야 생명 그 자체의 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닫는 것 같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상호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생명 죽임의 현상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무관심하거나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물질만능, 황금 만능적인 경제지상주의 가치관, 정복과 지배의 윤리관에 따른 생활과 생산방식의 결과인 생태계의 파괴, 오염, 자원의 고갈, 생명질서에 반하는 인간간의 관계, 제도가 그것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이어지는 생산방식과 생활방식 속에 진행되고 있는 이 같은 생존터전의 파괴는 인류 절멸의 시기를 계속 앞당기고 있는데도 변화의 노력은 미약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경우만 해도 삼천리금수강산이 상처투성이 쓰레기 상산이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마시고 있는 물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썩은 물이고 우리의 허파 속에 들어가고 있는 도시의 공기는 잠자리와 나비가 숨   수 없는 독가스와 다를 바가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모두가 버리고 떠난 농촌, 생명의 양식을 생산해야 할 농토는 온갖 농약으로 황폐화되어 벌레도 먹지 않는 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유지의 기본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 한  금, 밥 한 알 한숨의 공기조차 마음  고 마시고, 숨  고 먹을 수 없는 세상, 이것이 진정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이겠습니까?

  생각과 생활을 바꾸자
  인류 자멸의 행진을 중단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건강한 미래를 보장하는 길은 위기의 현실을 낳게 한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꾸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세계가 존재하는 원리가 어떤 것이며, 다양한 생명세계의 구성원 중의 하나인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과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생명의 세계관, 가치관에 따른 삶의 질서를 만들자면 무엇보다도 사람, 풀, 나무, 벌레 등 온 우주 만물은 하나의 우주 생명에 합일되어 있고 바로 각자의 몸과 마음에 우주 생명이 모셔져 있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임산부가 태아의 아기를 귀하게 모시는 것처럼 상대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공생 순환하며 더불어 사는 생명세계의 질서를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생산 관동과정에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밥 한알을 살려내는 일에서부터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한 살림’운동입니다.

  ‘한 살림’이란 말의 의미와 활동
  한 살림의 ‘한’이란 말에는 “함께”, “모두”, “한 방향”이란 뜻이 있고 ‘살림’이란 말에는 “살려 낸다”, “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한 살림’은 “함께 살려 낸다”, “더불어 산다”, “온 우주만물을 원래 태어난 모습대로 살려  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000여명의 생산자와 소비자, 실무자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협동적으로 운영하는 사단법인체인 한 살림의 사업 및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른 농업 생산기반 확대 및 우리농업, 농촌 살리기
  공생 순환하는 자연 생태계의 존재질서에 따른 농업 생산 방식을 확산하기 위한 교육, 정보제공, 기술 교류, 국내외 생산현장 견학  을 실시하고 있으며 명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농촌지역 사회의 정형을 만들기 위한 사업과 활동을 합니다.

  2) 유기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계획생산 공동구입 활동
  생산자 회원은 공생농법으로 건강한 농산물을 계획하고 소비자 회원은 공동체(3~5가구) 단위로 공동구입하는 이른바 직거래 활동으로 안정적인 농업 생산 활동 보장과 건강한 밥상을 동시적으로 보장받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생명살림 생활하기
  생산지 견학과 일손 돕기, 물 살리기 활동으로 합성세제 안 쓰고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 사용과 폐식용유 모으기, 자원 재활용 활동으로 우유 곽 모으고 재생휴지 쓰기 재활용 가능 용기 수거활동 등을 실천합니다.

  4) 더불어 사는 이웃과 사회 만들기
  높아가는 불신의 벽, 걱정과 기쁨을 나누는 이웃 간의 정이 그리운 오늘, 공동체 및 지부 활동을 통해 서로 돕고 봉사하는 정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단오생명 대동 굿, 한 살림 장터, 한 살림 하루 주막 등을 통해 생명 기운이 넘치는 삶의 체험을 짧은 시간이나마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체득하는 활동을 합니다.

  5) 교육, 홍보 활동
  생명살림 활동의 지혜를 주고 더불어 사는 삶을 느끼게 하는 강좌, 지역 한 살림 소개장터, 어린이 여름 생명학교 등의 교육 활동과 한 살림 사상과 활동을 전하는 회보와 물품이용 정보를 알리는 물품 정보지 발행 등의 홍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 살림 운동을 하시길 바랍니다.
  생명살림 운동은 나의 변화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 함께 변화할 수 있는 활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펼쳐갈 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동참과 주변에의 적극적인 권유가 필요합니다. 밥 한 알을 살리는 일에서부터 우주 만물이 더불어 사는 길을 만들어 보자고...


백두산과 88담배
허해철 / 해림통상, 상화항공 대표(본회 재정위원)

  “역사는 꿈꾸는 자, 행동하는 자의 손에 있다던가!”
  10년 전 중국을 처음 들어섰을 때 맞닥뜨린 그 광활한 대지는 내게 용솟음치는 활력을 주었다. 또한, 그 풍부한 자원은 놀라움과 식욕을 한꺼번에 주는 것이었다. 수 천 여년 전 배달민족이 중동의 수메르 문화로부터 이곳 만주에서 인류 최고의 요하문명을 일구었던 것이 아니던가? 더욱이 근세에 중국인의 의식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리 선주들이 피 눈물을 흘렸던 항일투쟁의 유적지가 바로 이곳 아닌가. 숨 쉴 때마다 그분들을 느낄 수 있고 그분들께서 어떤 교훈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설레임과 사명감을 갖고 디뎠던 10년의 짧고도 긴 이 시간 속에서 많은 일들, 많은 삶들과 어울렸고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녔다. 또한 많은 애환과 곡적들이 주저리주저리 엮여있다. 중국 사람들과의 관행과 습관을 터득하기 전의 처절한 체험, 한국 간첩으로 피첩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던 일, 그 뒤로도 계속 추적과 감시를 받은 일들이며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한, 중국에 밑거름이 된 한국 기업인”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었던 일들.... 중국 출장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펼쳐든 한국신문에 “88담배의 중국 수출” 보도 내용은 내게 많은 상념을 갖게 해 주었다. 그 동안 관계자의 말대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힘들다”는 ‘중국에 담배허가’를 받기까지의 시간들과 사연들이 그것이었다. 담배 수출에 대한 어려운 시장을 이미 93년도에 따내었는데도, 자신들의 인척에게 이권을 주려고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 국익을 저버리던 국가기관의 장들, 특히 중국의 담배 수입허가는 자국 정부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내기 힘든 일인데도 일개인이 이룬 이런 쾌거에 성원해 주기는커녕, 그런 파렴치한들과 공생하는 무리들. 그 때, 참 수치스러웠다. 내 나라가...
  그러나 난 오늘 희망에 산다. 그 더러운 자들과의 경쟁에서 나는 이겼고, 그들과 싸우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의롭게 사는 훌륭한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특히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도록 모범을 보이진 고 지 주교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그 일을 위해 애쓰시는 어른들, 그분들로부터 듣는 인생의 귀한 귀감들, 인연과 올바름에 늘 불러주시는 임원님들과 선배들.
  누가 삶이 외롭다고 했는가?
  나는 요즈음, 수호지의 어느 장면들을 연상하며 사는 시간이 많다. 이제 10년을 넘기면서 나는 새로운 10년을 추진 중이다. 만주 벌판과 백두산을 연결하는 중국북방 항공사의 항공사업을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국, 그 중에서도 동북 3성은 어떤 곳인가? 안중근 의사의 원혼이 묻히신 대련의 여순 감옥, 소현세자가 북벌을 계획하며 썼던 심양 고궁의 벽루, 살수대첩의 요하와 안시성이 있는 요서지방,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의 발자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집안 지방, 청산리와 일송정이 있는 길림, 해동성국의 꿈을 키웠던 흑룡강 지역에 있는 발해의 유적지들, 그 찬란했던 우리 선조들의 문물들이 지금도 계속 출토 되어 있는 여러 지방(물론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지 않기 위해 발굴되는 순간 소멸시키고 있지만), 모두 우리 선현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역사의 현장들이다.
  그뿐인가?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 쪼그라들었던 우리 민족의 9000년의 정기가 이제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가 바로 우리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이제 동방의 불꽃이 세계를 비추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런 날들을 위해 중국은 우리가 이해하고 협력해야 할 상대라고 본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항일 유적지를 찾는 여러 행사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의 정신 교육장으로 만주를 다녀오는 계획들을 수립하는 곳이 많은 곳으로 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중국에 다녀오고 진출하시길 빈다. 그래야 우리가 할 일이 보인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중국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활력 있는 시장이다. 현장에 있으면 피부로 절실히 느낀다. 중국 중공업의 중심지인 요녕지방과 만주 일대의 광활한 자원, 그리고 그 젖꼭지인 대련항에 쌍이는 엄청난 물동량!
  우리가 이제 중국을 모르면 안 되는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곳을 찾는 분들께 안내자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민족의 대 웅지를 펴고 있음에, 하나의 자그마한 디딤돌이 되고자 늘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올 여름엔 존경하는 어른들을 모시고 백두산 정상에서 정의로움을 얻는 지혜와 다짐의 시간을 가져보길 희망한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에 내 손으로 수출한 88담배를 나눠 피워보면 그 맛은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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