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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stice(2008-12-24 11:52:20, Hit : 3658
 십자로 남은 동티모르 학살의 흔적

    십자가로 남은 동티모르 학살의 흔적
  동티모르 여행기-마지막 유혜준 (hjyu99)  조경국 (kyungkug)  

13일 오후, 우리는 산타 크루즈 묘지를 찾고 있었다. 산타 크루즈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쯤 된다고 로고스리소시스의 전흥수 고문이 설명했지만, 정작 전 고문도 한번도 가보지 않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했다. 동티모르 여행 일정도 이제 이틀을 남겨두고 있었다. 조경국 기자와 나는 14일 오후 1시 35분에 딜리공항에서 발리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동티모르를 떠나기 전에 꼭 들르고 싶은 곳은 두 군데였다. 동티모르 국립박물관과 산타 크루즈.

현지인 운전사인 아또이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동티모르 사람이 국립박물관이 어디 있는지, 국립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과 우리가 부른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된 것은 1976년. 1991년, 포르투갈 의원단이 동티모르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당시, 400여 년간 동티모르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은 국제사회에 동티모르의 독립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포르투갈로 하여금 동티모르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르투갈의 방문을 계기로 동티모르 내 독립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외국의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속속 동티모르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 의원단과 함께 입국하기로 한 호주 기자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던 딜리시의 모타엘 교회에서 독립파 청년 고메스가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 중지가 발표된 다음날, 인도네시아군이 모타엘 교회를 습격했던 것이다.

고메스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고메스가 죽은 지 두 주일이 되던 날, 동티모르의 관습대로 사람들은 고메스의 묘지에 꽃을 바치려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꽃만 바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함께 계획했다. 약 3500명의 사람들이 묘지에 몰려들었고, 이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현장에서 200여 명이 사망했단다.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들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수백 명이 구속당했다고 한다. 구속당한 이들 중에는 고문으로 사망하기도 했다고. 이들의 유해는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273명, 실종자는 255명이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학살당한 장소에 묘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산타 크루즈라는 것이다. 그곳은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이 보고 싶었다.

현지인도 잘 모르는 학살의 현장, 산타 크루즈 묘지

오후 6시, 우리는 딜리시 외곽에 있는 묘지에 도착했다. 묘지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몇 천 명은 족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추측될 정도였다. 묘지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새로운 묘지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죽은 자의 마을에서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땅을 고르고, 십자가를 세우고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이곳이 산타 크루즈 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묘지들을 하나씩 찬찬히 둘러보고 난 뒤에 이곳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당시에 사망한 사람들의 낡고 퇴락한 묘지를 비롯해서 얼마 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새 묘지가 골고루 섞여 있었던 것이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냥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14일 오전, 전흥수 고문은 잘 아는 현지인에게 국립박물관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동티모르 국립박물관은 딜리 대학 근처에 있었다. 입장료가 1인당 2달러였던가?

동티모르 국립박물관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박물관이 분명했다. 전시된 물품은 동티모르에 관한 책 몇 권과 독립활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총기와 타자기, 옷, 편지 몇 점이 전부였다. 물론 사진도 몇 점 있었다. 책은 대부분 인도네시아어로 쓴 것이었다. 책 중에 동티모르의 체 게바라라는 니노 코니스 산타나의 전기도 있었다.

하다못해 포르투갈 점령 당시의 유물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전시실은 1층에만 있었는데 전시물을 다 돌아보는데 십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동티모르의 현실이라는데 어쩌겠나. 동티모르에는 역사적인 유물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에는 있지만 그것들을 추스르고 체계를 잡을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것들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산타 크루즈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전흥수 고문 덕분이다. 그곳에는 H자 형태의 흰 구조물이 서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우리는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돌로 만든 같은 모양의 하얀색 십자가들이 줄을 맞춰 죽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백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십자가를 그냥 멋있으라고 줄 맞춰 세워놓은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묘지였다. 이곳이 산타 크루즈인지 혹은 다른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이 있긴 했지만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또 주변에 확인해 볼만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또이 또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맞다고 하는 건지 아니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맞다고 말해도 틀린 경우가 있었고, 아니라고 해도 맞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묘지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떤가. 학살당한 자들의 유해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니, 그들은 이제 십자가로만 남은 셈이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이 나라에만 있을까. 세계 곳곳에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피를 대가로 이어져 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인도네시아 군과 민병대의 만행으로 많은 사람들 학살당해

동티모르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동티모르 사람들이 원한을 품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400년간 동티모르를 지배한 포르투갈을 아버지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며, 학살을 자행한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별로 미워하지 않는다면서. 일본인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티모르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지만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크고 순박한 눈을 가진 동티모르 사람들을 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 동티모르에 대한 자료를 뒤지면서 동티모르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료는 볼만한 게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단편적인 지식은 알게 되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인도네시아 점령 아래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그들은 독립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가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해 실시한 독립여부를 묻는 선거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었고, 독립을 얻어냈던 것이다. 말이 좋아 선거지, 인도네시아는 선거를 실시하기에 앞서 동티모르 전 국민들을 위협하고 구타하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였다. 선거에서 동티모르 국민의 78.5%가 독립에 찬성했지만, 인도네시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동티모르 전역에서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그렇게 해서 인구의 1/3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 아픈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바로 동티모르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음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 물론 10박 11일의 일정으로 차를 타고 휙 돌아다니면서 단편적으로 본 것만으로 동티모르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발리에서 머문 이틀을 빼면 동티모르에 있었던 날은 9일이 채 되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번 여행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기도 했거니와 동티모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는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던 약소국의 비애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나라가 독립의지를 강하게 불태워 끝내 독립을 챙취한 것처럼 현재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 : 십자가로 남은 동티모르 학살의 흔적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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