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4-23 11:07:34, Hit : 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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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마민족민주동맹(NLD) 조샤린


[버마] “나는 이제 점점 지쳐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약속시간이 되자 광화문역 1번 출구에 그가 나타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샤린씨”
“안녕하세요” 엷은 미소가 퍼집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데, 손에 우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네요, 그런데 왜 우산이 없어요?”
“별로 오지 않는 걸요. 버마에서 우기 때는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지듯 와요.”
손바닥으로 내리는 비를 받으며 하늘을 쳐다보는 그에게서 고향,
버마에 대한 그리움이 뭍어 나왔습니다.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대외협력국장 ‘조샤린’

“학생이라 무장투쟁을 할 수는 없었고, 학교 내에서 지하운동을 했었죠. 아시아 NLD 일본지부가 생기던 차에, 한국지부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98년에 50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국으로 왔어요. (씁쓸한 표정으로)그런데 지금 총 20명 중에서 초창기 멤버는 5명만이 남았네요. ”
버마민족민주동맹(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은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지’여사가 이끄는 정치동맹입니다. 1988년 민중항쟁(랑군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한 버마군부는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83%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이제까지 가택연금하고 있습니다. 이에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버마학생들은 국제적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간 신입생이였던 조샤린씨도 한국에 왔고, 이제 10여년이 흘러 그는 30대가 되었습니다.


사람, 사람들..군부독재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버마
“‘랑곤’에서 ‘만달레이’까지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요. 기차를 타면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가 걸리죠. 그 기차만 타고 가도 버마 민중들의 삶을 볼 수 있어요. 창 밖 풍경을 보면 건실한 집 한 채 짓지 못하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죠. 역 안에서는 손에 물건을 들고 팔고 다니는 고아들이 많이 보여요. 버마에는 고아들이 너무 많아요. 절에 가보면 한 곳에 100명에서 400명 정도의 고아들이 모여 있죠.”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탄압하는 군인들도 사정을 알고 보면 기가 막히고 답답할 뿐이죠. 군인 월급이 아쉬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군인이 돼요. 나이가 14살밖에 안되는 소년병들도 있죠. 누가 적인지도 모르고,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총을 들고 싸우러 나와요. 산에서는 싸우다가 잠들어서 자기 부대도 잃어버리고 그러다가 잡혀오면 너무 배고파서 그랬으니 봐달라고 하는 어린아이들이죠.”

“제 가족에게 가서 소식을 전해주겠다고요? 안돼요. 만약에 그렇게 되면 저희 가족들은 모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아야 해요. 제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게 되면 가만 놔두겠어요. 가족들하고는 전화도 2004년에 주고받은 것이 마지막이에요. 이모가 어느날은 전화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군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 날 이후론 친구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지, 직접 연락은 하지 못하고 있어요.”

버마의 혹독한 상황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탓일까요. 만약 버마에 갈 일이 생긴다면, 가족들에게 들러 소식 전해주겠다고 내건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베푼 친절이었는데, 되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버마족, 소수민족의 갈등… 민족문제 아니라 군부문제”
“버마군부의 대부분이 버마족이라는 이유로 소수민족들 중 일부가 버마족을 싫어하기는 해요. 하지만 오해예요. 아주 높은 직책을 빼고는 소수민족들도 버마군부 내에 들어가 있죠.
버마족의 소중한 목숨들도 버마민주화를 위해 바쳐지고 있어요. 1962년 7월 7일 대학 내에서 시위가 벌어졌을 때 무차별 학살을 당했는데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버마족이었어요. 2003년 5월 30일 아웅산 수지 여사와 함께 활동하던 270명이 살해당했을 때도 대부분이 버마족이었어요.

버마족이 60%라고 하지만 사실 진짜 버마족은 얼마 되지 않아요. 모두가 이미 섞여버렸죠. 저에게도 소수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다만 호적에 버마족으로 올라가 있는 거죠. 그런데 셴족 등은 잘 모르고 무조건 버마족이 나쁘다고 비난했지요. 잘 몰라서 그래요, 교육이 필요하죠.”

“한국에서의 10년... 저는 점점 지쳐가고 있어요”
“한국에 오겠다던 대학생 후배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어요. 여기에 와서 할 수 있는 건 공장일 밖에 없어요. 여기에 와서 비정규직을 하느니, 버마 내 대학교에서 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니 그 곳에서 열심히 하라고 했죠.”
“2000년에 난민신청을 해놓고 4년 동안 법무부와 싸우다가 제가 먼저 신청을 취소해버렸죠. 왜냐고요? 신청 허락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고 질질 끄는 법무부에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죠. 난민신청을 한다는 건 한 인간이 가진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하는 거예요. 그 앞에서 심사를 받을 때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내가 무슨 거지가 된 것 같이 창피하여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난민신청을 하여 받아들여진다 해도 버마가 민주화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 하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 그 에너지를 버마 전체를 위해 쓰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거요? 하고 싶은 건 많아요. 책 쓰고, 시 쓰고, 그림 그리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시를 좋아하고 즐겨 썼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쓰지 않게 되었죠.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집에 못들어간 날, 월세가 밀려있던 터라 집 주인이 제 짐을 모두 버려버렸어요. 그런데 그 짐에 내가 3~4간 썼던 시들이 모두 있었어요. 다신 그 시집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고, 그 때부터는 시를 쓰고 싶지 않더군요.”
10년 전 그가 한국으로 올 때, 1988년 8월 8일8888민주항쟁 ‘랑군의 봄’을 이끌었던 역사적 기억을 가진 버마인으로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격은 한국에 대한 그의 기대는 컸지만, 이제 그는 메아리없는 외침에 지쳐보인 듯 했습니다.

“버마의 자유를 위해 당신의 자유를 나눠주세요” 버마 민주화운동의 구호는 세계 속 한국의 지위를 단번에 드러냈습니다. 일본에 대한 과거사 사죄운동과 미국에 대한 반민시위에만 익숙해져있던 저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죠. 그런 그가 점점 한국인들의 무관심에 지쳐간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버마와 한국, 군부독재라는 같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버마군부와 한국정부가 친한 나라. 그 비극에 대해 더 알고, 알리고, 행동을 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은 채 모임을 마치고 그를 배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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