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8-11-24 12:07:54, Hit : 3834
 "내 땅, 내 국적 찾고싶다"

    고향에서 쫓겨난지 18년 “내 땅, 내 국적 찾고 싶다”
  
  낯선 땅을 향하며 눈시울 붉혀

지난 7일 오전 7시 네팔의 부탄 난민촌.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푸르나르 바라두르 비소(38)의 눈은 흐르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벌갰다. “20년 가까이 살았던 난민촌과 이웃, 친척들을 두고 떠나려니 슬프고 두렵다”고 말했다. 옷과 주방도구, 비행기 안에서 먹을 간식과 단돈 200루피(약 3500원)는 미국으로 떠나는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 물설고 낯선 이국 땅에서 그는 부모·아내·자녀 등 7명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의 운명은 “우릴 데려가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네팔에는 부탄 난민들이 있다. 부탄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쳐 나온 이들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난민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미국, 캐나다 등 제3국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뿌리 뽑힌 채 자기의 땅을 떠나 옮겨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네팔·부탄 양측으로부터 버림받아

로트샴파스족은 네팔계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1800년대부터 부탄으로 넘어가 살았다. 그런데 1988년 부탄 정부는 이들의 국적을 박탈하고 쫓아내기 시작했다. 부탄은 대부분 불교를 믿고 종카어를 쓰는데 이들 네팔 출신들은 힌두교를 믿고 네팔어를 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네팔계 일부는 부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부탄 정부는 이들에게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부탄 정부의 탄압으로 쫓겨나거나 도망친 네팔인들은 90년부터 네팔 동부 다막에 난민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팔정부도 이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부탄인도, 네팔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난민촌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렇게 ‘임시 인생’을 흘려보낸 지 벌써 18년. 이렇게 영원히 난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현재 7개 난민촌에는 10만8000명의 난민이 등록돼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난민촌의 기본 시설을 설치하고, 기초생계를 지원해주고 있다.

지난해 유엔난민기구를 중심으로 재정착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원하면 미국 등 제3국에서 시민권을 얻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이들은 다시 결심해야 했다. 또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내 인생 끝났지만, 아이 위해 미국으로

이들 가운데 비소는 떠나기로 결심한 난민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탄에서 태어나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18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부탄이 그의 고향이다. 하지만 부탄의 종카어를 쓰지 않는다는 이해못할 이유로 땅을 빼앗겼다. 일자리도 잃었다. 굶어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네팔로 도망을 했다.

“부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여러번 시도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요.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 난민촌에서 보냈어요. 그래서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은 없어요.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를 비롯한 가족 모두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물론 영어도 전혀 할 줄 모른다.

“공사장에서 노동일을 한 적이 있으니 그만큼만 하면 가서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를 배웅나온 이웃들은 “정착한 후 살 만한지 꼭 연락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버지 반대불구 기회찾아 떠나는 청년

구만 싱 라이는 26세다. 이 난민촌에 흘러온 것은 8세 때다. 어린 나이에 와서 부탄에서 지냈던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부탄에서 비교적 괜찮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부탄에서 공무원으로 일했어요. 하지만 부탄 정부가 박해하자 사직서를 썼죠. 그리고 결국 네팔로 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난민생활 18년째인 지금도 여전히 부탄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라이의 생각은 다르다. “여기서 18년을 살았어요. 좋든 나쁘든 제게도 새로운 기회와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내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고 싶어요.” 호기심 많고 똑똑한 젊은 청년에게 일거리도 없는 난민촌 생활은 답답할 뿐이었다.

“난민촌 생활은 미래가 없잖아요. 하는 일 없이 갇혀서 살다시피 하니 숨막히죠. 제 친구 중 한 명은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8년 전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어요.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그의 친구 중 서너명은 이미 미국으로 재정착을 떠났다. 그도 미국행 재정착을 신청했고 곧 떠날 날짜를 받을 예정이다. “아버지는 제가 떠나는 걸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지금은 이해하세요. 아버지와는 세대가 다르니까요.” 빚을 내 인근 메치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영어도 능숙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봤다. 대학을 다니느라 진 4만5000루피(약 80만원)를 얼마전 다 갚은 그는 미국으로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부도 더 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내땅으로 돌아가야지

먼 마야 수바는 58세다. 부탄의 치랑에서 남편, 자녀 9명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그는 부탄 정부가 땅을 빼앗고 국적을 없애자 92년 가족들과 함께 네팔로 건너왔다. “부탄 정부가 민주화운동하는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고, 네팔어로 된 책을 불태웠어요. 강제로 지시하는 것이 너무 많았죠.”

그와 가족들은 여전히 고향 부탄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래서 떠날 생각이 없다. 미국, 캐나다, 호주가 너무 낯설다. 친척들 중에도 떠난 사람이 없다. “난민촌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죠. 어쩔 수 없으니 강제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부탄에 있던 우리 땅과 집을 되찾고 싶어요. 내 농사짓고 내 가축 키우며 살고 싶은 거죠.”

난민촌 생활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물을 받아와 음식하고 마당을 쓴다. 배급품 중에는 채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끔 물물교환을 하러 나간다. 난민촌 안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교육 받을 기회가 적다. 그래서 10대 중·후반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젊은 여성들은 아이들의 미래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재정착을 선호하는 편이다. 반면 먼 마야 수바처럼 나이가 많고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이들은 재정착에 소극적이다. “재정착에 대해서는 1~2년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인생을 바꾸는 선택이니까요.”

부탄에서 살았던 자신의 3층집이 못내 아쉽고 그리운 그는 “내 집과 땅을 갖는 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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