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justice(2007-03-06 13:47:11, Hit : 5456
 문정현신부 인터뷰-공동선


  권두 인터뷰 : 21세기의 갈릴래아 대추리에서 -문정현 신부

  민중의 친구로 계시고 싶은 그곳에 남으시길

한국 신학의 핵심은 주체성과 연대이다. 교회의 권위를 비복음적으로 강요하거나 종교적 이념과 실천을 독단적으로 지배할 때, 이것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기준으로 그 불의를 질문하고 건강한 주체성과 교회 사이의 협력을 설득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토착화 신학의 바른 존재 방식이 놓여 있다. 과거 조선 교회가 유럽 교회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제사 문제의 핵심도 지역 교회의 문화적 주체성을 파괴당한 채 건강한 연대 관계를 갖추지 못한 데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관계와 미군 주둔 문제의 핵심도 한국 민중의 주체성과 두 나라의 연대의 성격에 놓여 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이 미국의 지배를 위한 폭력 구조와 한국 사회의 종속의 산물인가 아닌가, 평택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 틀 위에서 접근할 사안이다. 한국 군사 세력이 얼마나 건강하고 한국시민 사회가 얼마나 주체적인가의 여부에 평택 문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두 나라와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생명 관계를 위하여 상호 연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은 대규모 군사력을 앞세워 패배주의를 조장하면서 종속을 강요하고 우리는 거기에 굴복하여 굴종하고 있는가?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질문하는 방식이 단순하다고 할는지 몰라도 질문한다. 미국은 왜 그렇게 거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어떻게 상관되는가? 그 군사력이 미국 사람과 우리 민중의 생명의 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없을 때, 그 어떤 주체도 미국의 군사 정책에 관한 한 비그리스도교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군사 정책이 그리스도 신앙과 어떻게 상관되는지 질문할 자유, 적어도 이 시대 우리나라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유를 회복하고 실천하기를 기원하면서, 평택 대추리로 향했다(대추가 많이 열려서가 아니라, 풍성한 수확을 얻을 땅이라서 大秋里이다). 대추리를 갈릴래아로 삼아서 그곳 민중과 함께 예수의 고난을
짊어져 온 문정현 신부를 만나기 위하여.

성토요일, 예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익히는 시간에 신부님을 뵈었다. 하지만 대추리의 봄은 오히려 성목요일 어둠이 짙게 내린 올리브 동산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면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 나를 위해서 이번 인터뷰에 동행한 양병주 선생은 대추리의 첫 인상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봄 들녘 위에 펄럭이는 깃발들. 주인 없는 집 담장에 절규하듯 써 내려간 글과 그림들이 비장함을 더 해주고 있었다. 분명 봄은 왔는데 전혀 평온한 봄이 아니라 생사의 기로에 선 봄이었다.”신부님은 이 시대의 갈릴리 대추리 들에 와서 살다 보니 봄이 되면서 물이 오르는 땅들이 씨앗을 기다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하셨다. 마을에 남은 농부들은 직파를 준비하느라 분주하였다. 직파는 씨를 뿌려 놓고는 태평하게 지낸다고 해서 태평농법이라고도 하는데(땅의 기운이 실하지 않으면 하기가 불가능한 농사법이다), 대추리에 딱 어울리는 농사법이다. 지금 대추리야말로 큰 평화를 수확해야 할 땅이니까.

신부님은 먼저 오늘의 세태를 짚어가셨다.
“어려움은 있더라도, 긴 시간 동안 여러 역할을 통해서 변화 가져오게 되고 그러는 건데, 요즘에는 현장을 피하려고 들 해. 다들 자기 분야에 종사하면서도 크리스천이면 크리스천, 사제면 사제, 제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원주에서도 최소한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싫었어(“원주선언” 30주년 기념 미사 때 강론을 하실 때의 일을 두고 하신 말이었다). 기념행사도 하긴 해야지. 그렇지만 그걸 계기로 도약을 해야 하는데, 교회에서 그런 기미는 안 보이고. 사회 현장에서도 전에 동지들 중에서 초심을 잃고 사는 걸 보면서도 너 왜 이래, 하고 비판하지를 잘 못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만 해도 그래. 확장을 위해서 법을 만들더라도 이 일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이 현지 주민들을 만나봤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거든. 법만 만들어 놓고는 주민들의 아픔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은 개인의 영화에 집착하기 때문이지. 과거에 감옥살이한 정치인들이 좀 많아? 민주화에 크게 기여들 했지. 하지만 그런 기여는 지금도 요구되잖아? 과거로 만족하고 만다면 그건 말야, 과거를 팔아먹는 거지.

-신부님, 12월 16일이면 사제가 되신 지 40년이 되십니다. 돌아보시면 어떠신지요?
=어, 그러네. 딱 40년이야. 험난했던 것 같애. 순탄한 길은 아니었고, 어떤 때는 절규에 가까웠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일들이 많았어. 인혁당, 문규현, 소파 투쟁, 힘겨운 40년이야, 투쟁에 몰입해서 산 것이. 감옥에서 10주년을 맞았는데 어느새 40년이군. 어떤 사제는 40년을 채워서 은퇴를 하시더라고. 어느새 40년을 넘기는 건데, 은퇴라고 해야 사회복지 시설 작은 자매의 집 원장 말고는 떠날 게 없어. 다 떠나면, 건강만 하면, 풀타임으로 길 위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건강이 좋지 않아. 유신 때 당한 후로 아무래도 하체가 약하니까. 잘 넘어지고. 얼마 전에도 넘어져서 녹음기를 고장내뜨렸잖아. 심장도 안 좋고. 건강하다는 말 못해. 사는 날까지 이 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길 위에서 하느님한테 가는 게 행복하지.

-신부님께서 이렇게 투신하시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있었지. 우리에겐 계기가 있었어. 1974년 지학순 주교사건. 개인적으로는 김지하와 인혁당 사건이 또 계기가 되지. 이런 사건들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열렸잖아. 이 공의회에서 나온 사목헌장이라든가 여러 문헌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했죠. 교구에서 나름대로 교육을 열면서 무엇인가 과거 청산하고 그리스도인 삶을 모색해야 한다는 자각이 꿈틀거렸어. 지구촌 전체에 영향을 준 거지 공의회가. 인권 운동에 뛰어들기 전에 그러니까 유신 이전에 공의회 문헌 나오고 교구에서 연구도 하고 그랬지. 온통 공의회였으니까. 사목헌장, 새로운 변화라고 하는데, 이런 변화가 계기가 되어서 교회의 사회성도 인식하게 되었지. 그런 영향으로 의식이 깨이던 때에 지주교 사건이 발생한 거야. 공의회와 함께 사회를 신앙의 눈으로 새롭게 보게 만든 것이 또 있는데, 그게 EAPI(동아시아사목연구소)야. 1971년에 7개월 동안 EAPI 연수를 다녀왔어. 여기서 앞선 사고를 접하면서 전통적인 교회 생활의 틀을 반성하고 좀더 진보적인 데로 나아가게 되었지. 거기 다녀와서 곧바로 유신을 겪었는데, 그때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지주교 사건 때부터 행동으로 옮긴 거고, 지금까지 그 길을 가는 거지.

-신부님, 40년 여정에 어떤 흐름 같은 것이 있잖습니까?
=그런 게 있지. 인권 운동 차원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고문할 수 있냐? 이것이 70년대에 운동을 했던 이유였어. 민주화 운동, 군부독재 종식, 민주화 없이 인권은 사각지대다, 그래서 이번에는 민주화로 나아갔고. 통일운동은 인권과 민주화가 가로막히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분단이라는 것이 보이니까 하게 된 거고. 국민 기본권 유보해서 유린하면서 독재를 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통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통일운동에서 문규현 신부 파견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요. 젊은 사제단 신부들이 임수경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제를 북한에 파견하기로 결의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지. 문규현 신부 보면 죄스런 마음이지. 동생이 미국에 있을 때 내가 직접 통화했거든. 그때, 말하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문신부한테 전할 사람이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말해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말했지. “북한으로 가서 직접 군사 분계선을 넘어라. 미군 총에 맞
아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3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임수경과 같이 넘어라.” 이때부터 이미 자주운동으로 넘어갔는데, 2002년에 나는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주 문제를 중시했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북한 핵을 생존권 차원에서 보고. 2002년 대통령 선거 후에 만났을 때, 촛불을 내려 달라는 거야. 효순이, 미선이를 내리라는 것이었지. 그때부터 자주 문제가 벌써 꼬이기 시작한 거라고 봐. 그러나 벌써 97년부터 반미 자주 운동을 시작했다구. 1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에도 변화가 있어 왔어. 그렇지만 결정적 변화가 와야 하지 않을까 해. 평택 성공하면 한국 미국 관계가 달라질 거야. 민중 인식이 달라지고. 미국의 군사주의 재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미국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의식이 확산될 거야. 반미는 공정을 거스르는 세력으로서 미국에 대한 반대인거지. 정의로운 미국 사람들에 대한 반대를 말하는 게 아냐.

-신부님, 교회 내에서도 사제단과 자신을 해방신학에 물들어서 좌파 운동 세력에 동조하는 성직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해방신학을 읽고 이렇게 사는 게 아니거든. 금방 말했듯이, 현장에서 보고, 사람이 사람을 고문하고, 사실은 개인이 양심적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더라도 개인이 어쩔 수 없이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서 수행하는 비극까지 보면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외친거지. 불의에 대한 저항을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아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이지. 조중동의 억지와 다를 바 없어. 이럴 때일수록 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복음에 입각해서 살고 있는가 성찰해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지. 맞아 죽더라도 ‘아니’ 할 것은 ‘아니’ 하고 ‘예’ 할 것은 ‘예’하면 되지. 해방 신학이나 마르크스주의의 경제논리에 영향을 받아서 폭력적으로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식의 논리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상관없이 주장할 수야 있는 거지만, 그런 것이 안타깝지. 이러면 이럴수록 삶으로 증거해야 돼. 말로 해야 소용없어. 눈에 흙 들어가기까지 그럴수록 더 철저하게 살아야지. 해방신학을 읽기는 했지.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작품만도 열 번도 더 읽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1976년에 감옥에 갇힌 다음이었어. 그러니 해방신학이라는 단어를 모르면서도 행동으로 옮긴 거지. 동생 신부가 <해방신학>을 들여보내 주어서 읽고 또 읽었어. 한번은 교도관이 왜 이 책을 안 내놓느냐고 물어. 성서나 사전 같은 것은 영구보관이 가능하고 일반 서적은 기간이 있거든. “하루에 2쪽 읽기도 벅차다, 어려워서” 이렇게 말했더니 신부님들 읽는 책은 다 어렵더라 그러면서 넘어가더라구.

-말씀을 들어 보면 미국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을 동경도 했고, 공부도 가서 해보고 싶었고 했지. 하지만 나중에 그러니까 19~4-95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심기가 영 편치 않았어. 콜롬부스 대륙 발견 500주년으로 들떠 있었는데, 발견은 무슨 발견인가? 500주년은 무슨 500주년이구. 원주민들을 여러 방법으로 말살시키고 문화를 깨뜨려 버리고 그랬잖아. 문화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되살아나게 되지. 억압과 파괴가 있었기 때문에 눌려 있었을 뿐이지. 아스팔트 뚫고 나오는 풀처럼, 그렇게 눌렀어도 되살아나는 것처럼, 인디언들의 문화가 되살아나기를 바랬지. 남미 선교사들 책들, 미국의 착취 상을 전하는 책들, 반성하는 미국의 소리들이 없지 않았지만, 좋은 감정이 잘 안 생기더라구. 남의 것을 뺏어다가 부를 누리고 참 나쁜 인간들이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리고는 돌아왔는데, 군산
미군기지 사건이 97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거야. 당시만 하더라도 난 SOFA를 몰랐지. 차츰 실체를 알아 가면서 SOFA 문제는 지방에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99년이었지. 그러면서 매향리, 독극물,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거쳐서, 2003년부터 평택으로 달려온 거지. 2003년 11월 14일에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기획해서 시작한 거고.

- 신부님이 이처럼 험난한 사제의 길을 걸어오시는 동안 힘이 되어 준 것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시지요.
=있지. 구교우 집에서 태어나서, 영세 받을 때 바르톨로메오라는 본명 받고, 공소 생활을 오래 했어. 아침저녁, 삼종, 연도, 묵주 기도, 신물 나게 했지. 부모는 무조건 명령할 수 있었잖아. 6.25 때 주일 첨례를 이불 뒤집어쓰고 지냈으니까.
집안 어른 중에서, 그 당시 순교자 이야기가 경향잡지를 통해서 많이 소개되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책을 많이 읽으시더라고. 읽고 눈물 흘리시는 것을 많이 보며 자랐어. 내 수염이 외할아버지 수염을 닮았어. 지금도 순교자전이나 성경직해 같은 책을 읽으시면서 우시던 할아버지의 신앙을 기억하고는 해.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기도 끝에 물으시더라구. 공산주의자들이 “성당 다니냐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래” 하고. “성당 나간다고” 답할 거라고 했지. 그러자 “이번에는 “죽인대도?” 하고 물으시는 거야. “그래도 나간다고” 할 거라고 그랬어. 그러면서 죽이면 순교하지요“ 하고 답했거든. 그만큼 순교 영성이 할아버지나 부모님한테서 대물림되어 있었던 거지.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양친 부모 전해주신 것으로 신부 생활 하는 것 같아.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어. 부모님이 내 신부 생활 반 너머 해주시는 거 같애.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걸 감사하며 살지.
부모님은 내가 신학교 가는 걸 반대하지 않으셨어. 이기순 본당 신부님이 “신학교에 보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을 때, 부모님은 “간다면 보내야지요” 하셨어요. 신부님이 날 보고 “신학교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시길래, 어머니한테 전하니, “우리 아들이 신부되면 집안의 영광이지” 하시더라구. 어머니가 기뻐하시던 걸 지금도 기억해. 그 기쁨을 기억하며 신부 생활 기쁘게 하지요. 바티칸 공의회 이후 환속하는 신부들이 많았어. 동기들 중에서도 9명이 사제직을 떠났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부모님의 기대가 지켜 주었다고 할 수 있어.
배우지 않으셨어도, 신앙이 무서운 거야. 내가 잡혀 가지고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어머니 보는 것이 두려웠어. 까무러치실까봐. 그런데 오셔서는 꼭 안으시면서 우리 아들은 김대건 신부같이 돼야 해, 그러시는 거야. 어머니가 그때부터 대리석 같은 것으로 만든 김대건 신부상을 내 머리맡에 가져다 놓으셨어. 얼마 전에 깨졌는데, 어머니 생각하면서 다시 사다 놓으려구 그래.
아버지 편에서는 옳게 살아야 한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걸 배웠어. 동네에서 그렇게 사신 여러 사례가 있지. 부모에게 배운 것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큰 것 같애. 아까 순교 영성 얘기했는데, 감옥에서 한국 천주교 영성이 크게 작용했지. 순교자가 계셨지, 순교자들이 많았지 하면서, 좌절하고 맘 바꿀 수 있었는데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 생각을 하며 견뎌냈지. 순교영성은 나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유산이기도 했지.

-신부님, 사제로서 살아오는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병자 방문을 열심히 했던 것이 보람이었어. 매주 기록을 하면서 방문했지. 방문하면서 대화 나눈 것 등을 기록해 뒀다구. 일곱 명에서 30명으로 돌볼 환자들이 금방 늘더라구. 그들에게 크게 위로를 주는 것 같았어. 이전 기록을 보고 가서는 병세를 말하면서 “지금은 어때요” 하고 물으면, 관심 가져주는구나 하면서 감격해 하는 거야.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도 눈에 띄게 달라지더라구. 환자를 찾을 때 빈손으로 안 갔어. 선물을 사가지고 갔지. 수녀님한테 돈을 맡겨 놓고 수녀님이 가시더라도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했지. 그것이 보람 있었어. 상을 당해서 가면 대하는 게 달라. 가족과도 친근하고. 가족은 산 자들과 또 이야기를 하잖아. 이렇게 하셨다 하면서. 신뢰가 생기더라구. 병자 사목이 중요한 것 같다고 후배 신부들에게 권고하지. 병자 사목을 위한 본당 단-중-장기 문건을 준비하여 우리
신학연구소의 협력으로 신자들이 참여하게 해서 토론을 붙이고 해서 관련 자료를 준비했지. 병자 사목을 어느 정도 하니 자료로 축적되더라구.
어떤 때 한 병자를 방문했는데, 따님이 전기면도기를 사줬대. 그게 고장난거야. 그렇게 안타까워하더라구. 다음 방문 때 그걸 선물했더니, 병이 나은 듯이 기뻐하더라구. 본당 사무실에서 자료 관리하게 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읽어 보고 하니 히스토리가 발생하는 거야. 내가 이 길로 오지 않았으면, 병자 사목을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아.

문신부님을 비판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신부님이 사제로서 순명을 벗어난 것처럼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문신부님한테 사제직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명의 산물이다. 부모님과 순교자들에 대한, 그리고 특히 루가 복음의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그 순명을 어떻게 살아갈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 순명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와 동행한 양선생은 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살아가시면서 변화를 이루어 오셨는데, 마지막까지 그렇게 사시다가 가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기도한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주님의 사제로, 민중의 친구로 그분이 계시고 싶은 그곳에 끝까지 남으시기를. 그리하여 주민, 시민들과 함께 자주와 평화의 씨앗을 대추리에, 한반도에 가득 뿌리실 수 있기를. 그 씨앗들이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푸르게 자라나서 세계 평화의 양식이 되고, 또다시 종자가 되기를.

  주)미국은 현재 서울 용산기지와 동두천의 미2사단을 평택으로 옮기려 한다. 그렇게 하여 이미 팽성군 대추리에 있는 험프리 미군 기지와 평택 서부를 중심으로 신속한 기동력과 정밀 타격력을 갖춘 “아시아·태평양 신속 기동군”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일대 285만평이 미군기지로 예정되어 있다.  국방부는 작년 8월부터 협의매수 단계를 진행시켰다. 매수에 응하지 않은 땅들에 대해서는 작년 12월에 매수대금을 공탁하고 강제수용을 추진 중이다. 국방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추리 인근 285만평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추리 지역에서 논갈이와 볍씨 뿌리기를 실시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4월 말까지는 이 같은 조치를 실시할 뜻을 내비쳤다. 국방부에서 이렇게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기지 이전 전체 계획을 올해 6월말까지 완료하고 7월부터 내년 6월까지 설계를 끝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2006년 9월말까지 환경영향평가를 마치고 10월부터 기반 공사를 착수하여 내년 4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모든 시설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국방부 관계자들조차 이 같은 일들이 주민과 시민 사회의 정서를 무시한 일종의 군사 작전처럼 집행되고 있다는 점을 염려한다. 이 지역의 농민과 평화 운동을 전개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매우 거세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항의 한 중심에 문정현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있다.

황종렬 / 가톨릭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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