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정의평화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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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김승훈신부





  권두인터뷰

『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잘해 주실 거야 』  김정남

  그 사람 -  김승훈 신부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잘해 주실 거야

벌써 3년이 지났다. 김승훈 신부가 선종善終한 것이…. 김승훈 신부 장례미사에서 정진석 대주교는 강론을 통하여 김 신부의 말년과 관련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죽기 얼마 전 김승훈 신부가 찾아와, 자신이 사제로 서품된 후 신부로 맨 처음 부임했던 바로 그 신당동 성당에서 사목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아, 김승훈 신부는 이런 분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김 신부와는 어쩌면 전혀 다른 모습이 김 신부의 진면목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입가에는 가벼운 냉소가 흐르고, 누구에게나 반말 비슷한 말을 찍찍 내뱉는, 다소는 거만했던 김승훈 신부에게, 이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죽는 날까지 사목을 하고 싶어하고 특히 신당동 성당과의 인연에 그렇게 목말라 했다는 사실이 새삼 김승훈 신부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을 더하
게 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더욱 애련하게만 느껴지던 것이었다. 신당동 성당은 그가 사제서품을 받고, 1962년 12월, 사제로 부임한 첫 성당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9월 25일, 그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날, 아현동, 서대문, 혜화동에서 잇따라 동료와 선배 신부들을 만나고 걸어서 신당동의 사제관에 돌아왔다. 비를 맞아 몸이 으슬으슬 한데다가 피곤까지 겹쳐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이내 잠이 들었다. 사제관 아주머니는 이런 날씨에는 불을 넣어야지 하는 좋은 마음으로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었다.  그러나 그 방은 1년 동안 불을 넣어본 적이 없는 온돌방이었다.
그 다음날은 순교복자축일이었는데 아침에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처음 성모병원으로 실려 간 신부를 놓고 사람들은 “이 사람 못 산다”고 했다. 의식은 물론 없었고, 발은 굳어 있었으며, 온 몸에는 보라색 반점이 번져 있었다. 주치의는 재활의학을 전공한 의사였지만, 의사를 제쳐놓고 매사에 적극적이던 어머니가 병구완을 좌지우지 했다. “내 아들 내가 살린다”면서 병원에서 사람을 불러 안마를 계속 시키기도 했다. 밖에서는 전국에서 젊은 사제를 살리자는 기도가 이어졌다. 이런 기도와 정성 탓이었을까 그는 기적적으로 20여일 만에 눈을 떴다. 눈을 뜨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어린애 같아서 걷는 것에서부터 말 배우기까지 하나씩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한달 가까이를 혼수상태에서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의
식이 되살아났다. 그의 머리가 벗겨진 것도, 말투가 어눌해진 것도 그 모두가 연탄가스 중독의 후유증이라는 것을 나는 뒤에 알았다.

  하느님에게 의탁하는 사제
1986년의 5․3사태와 관련하여 쫓기던 이부영李富榮을 숨겨주고, 그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1986년 말부터 나는 수배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7년 3월 초 기적적으로 만난 전병용全炳鏞에게서 감옥의 이부영으로부터 온 3통의 편지를 받았다. 전병용 또한 수배 중이었는데, 나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난 며칠 뒤 전병용은 체포되었다. 영등포교도소에 갇혀 있는 이부영으로부터 온 편지는 “우촌友村(우촌은 이돈명 변호사가 내게 지어준 아호雅號였다) 보게”로 시작되었는데, 정말 경천동지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시차를 두고 세 번에 걸쳐 쓴 편지를 한꺼번에 받은 것이다. 읽어가면서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해 1월에 있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범인으로 지목되어 지금 감옥에 들어와 있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진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족 면회 때, 진짜 살인을 했느냐고 묻는 가족의 질책에 울면서 결코 사람을 죽인 일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것을 교도관들이 들었는데, 그 사실이 감옥에 일찍 들어와 있던 이부영의 귀에까지 들린 것이다. 이부영은 왕년의 기자의식이 발동, 교도관을 통해 계속 추적, 진짜 고문에 가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3명의 명단을 알아냈고, 그것을 긴박하게 내게 알린 것이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들은 살인범으로 몰리는데 점차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이 사실을 검사에게 호소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군데 오래 두는 것이 비밀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지 이들의 신병을 아예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시켜 버렸다. 대공수사단의 고위 간부들은 가족과 본인들
을 찾아와 각본대로만 해주면 사후보장은 물론 거금을 주겠다고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협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듣기조차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편지의 전후 문맥이나 편지에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고영구 변호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고영구 변호사를 통하여 고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등과도 상의하고 또 박종철군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뒤진행되고 있던 추도회, 49재 등 민주화운동진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였다. 그리고 혹시 행간(行間)에라도 새로운 사실이 있는가 싶어 신문이란 신문은 다 뒤졌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발표할 문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 무렵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야당의원의 대정부질의를 통하여 공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실제로 그때 가까스로 연락이 닿던 몇몇 야당 의원들을 통하여 질의자로 선정된 의원들의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한결같이 자신 없어 했다. 야당의원을 통해 공개하겠다는 생각을 접었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은 자신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것은 그들이 비겁했던 탓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위기가 그만큼 살벌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야당의원들을 비난할 수가 없다. 이제 길은 없었다. 사제단을 통해서 발표하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길이었다. 벌써 이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과 그 딸이 명동 성당의 함세웅 신부에게 수도 없이 찾아갔다. 내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함세웅 신부는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면 구파발 성당에 와서 미사를 집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영구 변호사 부인은 구파발 성당으로도 찾아갔다. 그러나 함 신부로부터 ‘한다, 안한다’는 확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초조했다. 그래서 “이 모든 진실을 사실로 확인․제보한 것이 김정남”이라고 공개해도 좋다면서, 나는 함세웅 신부에게 매달렸다.
뒤에 안 일이지만, 함세웅 신부는 5월 18일 개최되는 5․18기념미사 때, 서울사제 중 연장자요 단장격인 김승훈 신부가 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여러 차례 홍제동 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를 찾아갔는데, 무슨 낌새를 느끼셨는지 김 신부의 어머님이 곁을 떠나지 않아 말도 못 꺼내고 되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승훈 신부가 안 되면 전주의 문정현 신부로 하여금 발표케 할 요량으로 문정현 신부를 비밀리에 상경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월 17일, 김승훈 신부를 찾아갔다. 이 날도 김 신부의 어머니가 두 사람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 날은 뭔가 좀 달랐다. 함 신부가 “어머니 가서 쉬십시오” 하니까,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어. 지금 무슨 중요한 일을 계획하고 있지?” 하시며, 그 전날 밤 꾼 꿈 얘기를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그 꿈은 이런 것이었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났
는데, 김 신부는 큰 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김 신부를 그 웅덩이에서 건져 올려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꿈 얘기를 하시고는 자리를 피해주어, 비로소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그 다음날 저녁 6시,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 때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고문치사조작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기로 확정된 것이다. 김 신부의 어머니는 늘 기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런 영묘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 신부와 어머니는 모자간이라고는 하지만 유난히도 자별했다. 구식 타자기로 강론원고를 써서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읽어드리는 모습을 보고 감격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리하여 1987년 5월 18일 오후 6시, 명동 성당에서 열린 5․18기념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다”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명의의 역사적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제대 위에서 성상을 향하여 절할 때는 제의가 머리를 덮을 정도로 김승훈 신부는 엄숙․경건한 모습이었고, 성명을 읽어가는 동안 김 신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듣는 사람들도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이 같은 광경을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영구 변호사 부인으로부터 들었고, 또 김승훈 신부의 책에서 읽었다. 김승훈 신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기에 족하다.  성명의 초안은 내가 썼는데, 나는 김승훈 신부를 통하여 그 성명의 길이가 3천1백20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성명을 발표하는데 김승훈 신부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그 성명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고문 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
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중대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이 성명이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김승훈 신부가 살아생전에 즐겨 썼던 말이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잘해 주실 거야”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 자신이 자서전의 제목으로 쓸 만큼 그가 즐겨 쓰는 말이었고, 후자는 그를 가까이에서 겪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김승훈 신부의 신앙의 깊이나 인간적 성숙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의 말은 김 신부의 어른다운, 그리고 낙천적인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그러나 나는 김승훈 신부가 즐겨 썼던 이들 말에서 그 어려웠던 시절을 김승훈 신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까 하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도 힘들고 무거웠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온전히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김승훈 신부의 기도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맡기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5․18기념미사 때 그 성명을 읽도록 떠 맡겨질 때 그것을 읽을 때까지의 심정이, 아니 그  후
결과를 기다릴 때까지 그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그가 속으로 거듭거듭 속삭인 것이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잘해 주실 거야”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떠 맡겨진 이 짐, 역사의 짐을 지기는 하지만, 나 혼자로서는 너무 벅차고 힘드오니, 하느님, 당신께서 알아서 다 잘해주십시오”하는 절절한 기도가 그 말 속에서 배어 있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김승훈 신부를 가리켜 ‘한국교회의 바위’라고 했지만, 그 바위가 되기까지 김승훈 신부는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달팠을까. 나 역시 김승훈 신부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워 드렸다. 그 점이 나로 하여금 지금도 그분에게 더 할 수 없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김승훈 신부가 그런 짐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숙명적인 일이었다. 서울의 사제단 신부 가운데는 가장 연장자인 것 자체가 그 분을 그렇게 만들었다. 1976년 3월 1일, 3․1절기념미사 때 강론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렇고, 3․1민주구국사건으로 신현동 신부가 구속되면서 사제단의 단장격이랄까, 그 대표직을 맡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맡아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렇다. 사제단의 초기에는 신현봉, 박상래, 김병도 신부 같은 분이 사제단을 선도하거나 병풍의 역할을 해주었지만, 신현봉 신부가 구속되면서 이제 김승훈 신부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1982년 4월 15일, 김승훈 신부는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때도 김승훈 신부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성명은 이 나라에서 공개적으로 발표된 최초의 반미적 성격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때만 해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민족자주적 애국심의 발로이며, 최기식 신부의 처신을 사제로서 정당한 것”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운 계절이었
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김승훈 신부는 하느님께 대한 절절한 기도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와 채찍으로 이 말을 되씹었을 것이다.

김승훈 신부가 타의로 이런 무거운 짐을 져야 했던 일은 하나둘이 아니다. 동대문 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한 것, 왕십리 성당에서 ‘문익환 목사 출감 환영식’을 연 것, 홍제동 성당을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방한 것, 시흥동 성당에서 범민족 대회를 열 수 있게 한 것 등이 바로 그 것이다. 뿐인가. 그 어려웠던 시절, 인권이나 민주화를 위한 단체를 만들 때 공동대표나 발기인, 또는 그 병풍 역할을 해주어야 했던 것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는 그를 찾아와 부탁하는 사람들을 한번도 그냥 헛되이 돌려보낸 일이 없었다. 그때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때 이름을 빌려주고, 대신 짐을 떠맡아지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김승훈 신부인들 그것이 왜 무섭고 두렵지 않았으
랴. 다만 “괜찮아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잘해 주실 거야”하고 자신을 달래면서 그 짐을 자신의 어깨에 맡아졌을 것이다. 는 암이라는 병이 스트레스의 집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1970~80년대 너무도 많은 투옥인사들이나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암으로 쓰러졌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김승훈 신부도, 겉으로는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그를 암으로 쓰러지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민주화라는 긴 여정을 함께 걸
어온 우리 모두가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그는 그의 말대로 꽤 괜찮은 신부였다. 그가 시흥동 성당에 부임하면서 첫 강론 때 했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아련하다.
  "제가 생각하는 저라고 하는 신부는 별로 재미있는 신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신부입니다. 많은 어려운 사람들, 힘들어하는 사람들, 또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찾아가는 신부입니다.
… 아마 꽤 괜찮은 신부일 것입니다.”

김정남 /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쓴 책으로 『진실, 광장에 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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